이택구의 소방클리닉
최근 고층 아파트 화재가 잇따르면서 입주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피난 안전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발코니 인접 세대 간 피난을 위해 설치되는 경량칸막이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현행 건축법 시행령 제46조 제5항은 4층 이상 아파트의 경우 발코니에 인접 세대와 연결되는 경량구조의 경계벽을 설치하면 별도의 대피공간 없이도 피난이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 화재 상황에서 경량칸막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경량칸막이는 화재 시 쉽게 파괴할 수 있도록 석고보드 등 경량 자재로 시공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화 성능이나 차음 성능을 이유로 시멘트 벽체로 시공되거나 붙박이장 설치·물건 적치 등으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부 세대에서는 구조 변경으로 칸막이가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시공 미비를 넘어 입주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안전 사안이다.
더 큰 문제는 입주민 인식 부족이다. 상당수가 경량칸막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으며 피난 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파트 거주자의 절반 이상이 칸막이 위치와 사용법을 알지 못했으며 피난 교육 경험이 있는 경우는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제도가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데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량칸막이는 ‘있으나 마나 한’ 구조물이 돼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첫째, 입주 전·후 피난 교육을 정례화하고 칸막이 위치와 사용법을 명확히 안내해야 한다.
둘째, 정기적인 점검을 통해 불법 구조 변경이나 물건 적치 등 피난을 방해하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
셋째, 경량칸막이의 시공 기준을 강화하고 실제 파괴 가능성을 검증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최근 신축 아파트는 복도식 구조 대신 타워형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칸막이 설치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는 대피공간이나 하향식 피난구 등 대체 피난시설의 설치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들 시설 역시 창고로 전용되거나 접근이 어렵게 변형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개별 시설의 설치 여부를 넘어 피난시설 전반의 실효성 검토와 입주민 인식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화재는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온다. 피난 경로는 형식적 요건이 아니라 실질적인 생명선이어야 한다. 경량칸막이가 진정한 ‘생명의 문’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와 인식, 관리의 전면적 재정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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