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구의 소방클리닉
화재가 발생했을 때 “절대로 승강기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더 이상 안전 교육의 기본이 아닌 생존을 위한 상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특히 고층 아파트 화재 시 승강기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현저히 부족하고 구조적으로도 이러한 위험을 방치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현재 국내 공동주택에는 건축법 시행령 제46조에 따라 높이 31m를 초과하는 건축물에는 비상용승강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아파트의 경우 건설·관리의 효율성과 비용 문제로 일반용 승강기를 비상용과 겸용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이러한 겸용 구조 자체는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문제는 화재 발생 시 해당 승강기를 누가, 어떻게,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제 체계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비상용승강기의 본래 목적은 ‘소방활동용’이다. 소방관의 신속한 진입과 구조·구급 활동을 위한 전용 수단이기 때문에 화재 감지 시 자동으로 리콜층(주로 1층)으로 내려와 ‘소방대기상태’로 전환돼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NFPA 101, EN 81-72 등 국제 기준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해도 소방대가 현장 도착 전에 입주민이 자율적으로 이용 가능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 표지판에는 ‘화재 시 승강기 이용 금지’가 기재돼 있지만 시스템적으로 승강기 이용을 차단하는 어떠한 물리적·기계적 장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결국 패닉 상태의 입주민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구조적 결함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주된 이유는 화재감지기의 오작동 또는 허위 경보로 인한 신뢰성 저하에 있다. 즉 실제 화재가 아닌 상황에서도 승강기가 리콜 상태로 전환되고 이로 인해 입주민 불편이 빈번히 발생하자 관리주체와 승강기 유지관리업체가 해당 기능을 아예 비활성화하거나 수동 전환 방식으로 우회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무관심과 편의주의는 극단적인 인명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승강로는 연기가 상승하는 굴뚝 역할을 하며 전원 공급이 중단될 경우 승강기 내부는 질식 위험의 밀폐 공간이 된다. 또한 연기 유입으로 인한 기계적 오작동 가능성, 화재열에 의한 케이블 손상 등은 모든 상황에서 입주민이 승강기에 갇히거나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 보더라도 미국, 일본, 독일 등은 화재 발생 시 승강기 자동 리콜 기능과 제어권을 소방대가 가져가는 것을 강제하고 있으며 일반인은 화재 시 승강기 호출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돼 있다. 국내 역시 ‘비상용승강기 리콜 및 잠금장치 설치 의무’, ‘허위 경보 최소화를 위한 감지기 성능 인증제 강화’, ‘입주민 대상 화재 시 행동 매뉴얼 교육 정례화’ 등이 시급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입주민 스스로의 경각심과 행동요령 숙지다. 화재 시에는 반드시 계단을 이용하고 승강기 접근은 피해야 하며 관리사무소 및 입주자대표회의는 이를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실제 대피 훈련 시 시뮬레이션을 포함해야 한다. 비상용승강기는 결코 입주민의 탈출수단이 아닌 소방관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소방청과 국토교통부, 아파트 관리업계는 제도 개선과 기술 보완 그리고 경각심 고취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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