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추운 겨울을 이겨낸 매화를 보려 지난 2주 동안 토요일마다 창경궁 낙선재 앞 매화를 찾았건만 꽃봉오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저번 주 맹사성 집터의 건물 옆에 핀 매화 일곱 송이를 만난 게 전부다. 봄을 막아서는 꽃샘추위도 만만치 않지만 매화를 보며 봄은 이렇게 더디 옴을 느낀다. 2월 말경에는 홍릉숲 출퇴근길에 하늘에서 “끼이럭, 끼이럭”하는 기러기 소리를 듣는다. 무리에서 뒤처진 몇 마리를 대장 기러기는 되돌아가서 “끼이이럭, 끼이이럭”하며 선회 비행해 이끌고 올라간다. 속도는 다르지만 곳곳에서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충남 서천 마량의 매화
충남 서천 마량의 매화

봄이 오면 어김없이 태양 빛은 늘어진다. 늘어진 태양 빛을 맞은 한강의 기러기는 번식지를 찾아 한북정맥을 넘어서 백두대간을 타고 북으로 향할 것이다. 이 기러기는 오늘 저녁엔 아무르강가에 도착하리라. 왜 이렇게 매화는 추운 겨울에 일찍 피고 기러기는 어떤 신호로 북쪽으로 향할까? 낮과 밤의 길이에 반응하는 식물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장일(長日), 중일(中日), 단일(短日)식물로 나눴다. 낮이 길어질 때 꽃피는 장일식물, 낮이 짧아질 때 꽃피는 단일식물, 광주기와 상관없이 꽃피는 중일식물로 구분했다. 낮이 길어지는 봄에 꽃이 피는 개나리, 진달래 등은 장일식물이고 낮이 짧아지는 가을에 꽃이 피는 코스모스, 국화 등은 단일식물이다.

올해 2월 26일에 본 서울 북촌의 매화
올해 2월 26일에 본 서울 북촌의 매화
올해 2월 26일에 본 서울 북촌의 매화
올해 2월 26일에 본 서울 북촌의 매화

식물이 적당한 계절에 꽃을 피우는 것은 광(光)주기와 온도를 인지하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과학자인 미하일 차일라키얀이 1930년에 플로리겐(florigen)이라고 붙인 물질이 바로 이 메커니즘을 주관하는 호르몬이다. 최근 연구 결과, 식물은 FT(Flowering Locus T) 유전자와 단백질을 가지고 있고 잎끝에서 생성된 FT 단백질이 이동하면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화의 경우 추운 시기(chilling time)를 거쳐야만 꽃이 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매화의 속성은 동아시아에서 문학의 단골 소재가 돼 왔다.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온갖 꽃 다 진 뒤 홀로 곱게 피어서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계절의 정취 한 몸에 모으고 작은 동산에 서 있네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맑은 물에 비스듬히 앙상한 가지 뻗어 있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해 질 녘에 아스라이 은은한 향기 풍겨오네

위의 글은 북송 시인 임포(林逋)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시 일부로 매화가 앙상한 가지에서 은은한 향기로 표현되고 있다. 임포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고, 이외에도 매화를 친구와 형제로 삼은 선비들이 많았다. 매화를 즐기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이며 의인화된 자연물로 매화를 많이 인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며 생존한 매화의 진화 메커니즘이 힘든 상황에도 고결하고 굴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옛 선인들은 매죽헌(성삼문), 매월당(김시습), 매헌 윤봉길 의사 등 자신의 호에 매(梅)라는 글자를 넣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 지명에서 매산로, 매화로 등 매(梅)가 사용된 예를 쉽게 찾을 수도 있다.

쇠기러기가 북상하는 모습
쇠기러기가 북상하는 모습

우리나라에서 2월부터 3월까지 매화를 만날 수 있다. 제주 서귀포 휴애리, 섬진강 하동과 광양에서 매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경남 산청 시천면 남명 조식 유적지 산천재의 ‘남명매’와 단성면 남사예담촌의 ‘원정매’,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의 ‘정당매’는 산청 3매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홍릉숲과 남산의 와룡매가 있고 용답역에는 매화거리가 있다. 봄의 문턱에서 우리나라 어는 곳에서나 매화를 볼 수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매화 한두 그루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러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은은한 매화 향이 짙어지면 어느새 따스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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