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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동요와 동화속에 등장하는 토끼를 들판에서 같이 뛰어노는 친구 같은 존재로, 때로는 위기 속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영특한 대상으로 알고 지내왔다. 친구들과 손잡고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를 부르며 뛰어놀기도 하고, 밤하늘의 달을 보며 윤극영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를 합창하기도 했다. 또한 자라에게 속아 하마터면 용왕에게 간을 뺏길뻔한 전래동화 별주부전의 ‘토끼전’과 서양의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를 읽고 배우면서 토끼의 재치와 영리함을 교훈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이야기에 나오는 토끼는 멧토끼로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간과 문화적으로도 매우 친숙한 정서(情緖) 동물로 알려져 있다.

필자도 어렸을 적에 집토끼의 일종인 ‘뉴질랜드화이트’, ‘친칠라’를 길렀다. 토끼는 새끼를 낳을 때 누군가 보게 되면 새끼를 죽이는 습성이 있으니 절대로 들여다보지 말라고 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참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림 끝에 만난 귀여운 어린 토끼와 밭에서 같이 놀았던 추억이 있다. 그래서 정작 산에서 회갈색 멧토끼를 만났을 때는 쫑긋한 큰 귀를 가진 모습에 놀랐다. 멧토끼는 ‘Lepus coreanus’ (Thomas 1892)라는 학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만 분포하는 한국 고유종이고 국제자연보존연맹에서 정한 멸종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어서 관심이 필요한 종이다. 우리가 종종 도시의 공원에서 보는 집토끼는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 사는 굴토끼(Oryctolagus cuniculus)를 가축화한 것이다.

강원도 평창 가리왕산에서 만난 멧토끼
강원도 평창 가리왕산에서 만난 멧토끼

야생에서 멧토끼를 직접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멧토끼를 노리는 삵, 담비와 같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멧토끼는 매우 예민하고 민첩하다. 달리는 속도도 빨라 산속에서도 시속 80km로 달릴 수 있다. ‘도망간다’는 말의 속어인 ‘토끼다’는 이렇게 재빨리 도망가는 토끼의 습성에서 비롯된 말이다. 국립생물자원관이 멧토끼 6마리에 추적기를 달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들의 행동권은 최대 27헥타르 정도로 여의도 면적의 10분의 1 정도나 된다고 하니 멧토끼의 달리기 속도를 고려했을 때 이해가 된다.

하지만 과거보다 멧토끼가 선호하는 서식지가 줄면서 개체수도 다소 감소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한편 관찰율이 낮아지기도 했다. 사실 멧토끼는 풀과 나무줄기를 주로 먹는 초식동물로 이름처럼 산보다 탁 트인 풀숲에 사는 것을 더 선호한다. 현재 울창한 숲이 많아지고 개활지, 초지, 억새 숲은 오히려 줄었다. 이러한 환경변화로 인해 멧토끼의 서식지도 같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토끼의 마릿수가 많다는 것은 이를 잡아먹는 포식자인 삵, 담비 등의 수도 많아 숲 생태계의 건강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1969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멧토끼 전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100헥타르당 멧토끼 개체수가 1980년대부터 헥타르당 6마리 이상으로 급증했고, 2001년까지 12.3마리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오히려 2004년에는 오히려 8마리로 줄었다는 것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서울 배봉산에 설치된 집토끼 사육장
서울 배봉산에 설치된 집토끼 사육장

12세기 전반에 불교설화와 세속설화를 집대성한 ‘곤쟈쿠 이야기집(今昔物語集)’에는 토끼가 달에 있는 까닭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옛날 인도에 토끼와 원숭이와 여우가 살았는데 어느 날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이 나타났다. 원숭이는 나무 열매를, 여우는 물고기를 잡아서 노인에게 가져왔다. 그런데 토끼는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고 “나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 몸이라도 드십시오”라면서 모닥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이 노인은 제석천(하느님)이었다. 그는 토끼의 자비심에 감동한 나머지 이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달나라로 토끼를 올려보냈고 지금도 달에는 토끼가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서울 배봉산의 집토끼는 굴토끼의 사육화된 종이다
서울 배봉산의 집토끼는 굴토끼의 사육화된 종이다

현실에서 토끼의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상상 속의 토끼는 여전히 달 속에 그리고 노래와 이야기 속에서 친근하고 때로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남아있다. 올해 계묘년 토끼의 해를 맞이해 오는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에는 둥근달을 바라보면서 토끼의 부지런함과 지혜로움을 새해 다짐으로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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