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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앙상한 가지와 줄기를 가진 채 고개를 숙인 중년 신사의 모습을 닮았다. 조금은 앙상하고 쓸쓸한 모습이지만 잎이 울창했던 한여름과 달리 치장하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고 의연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겨울나무와 겨울숲은 볼거리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의 군데군데 돌기 같이 불쑥 나와 있는 겨울눈이 그것이다.

겨울눈은 겨울이 다가왔다고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잎이 떨어지기 전 여름에 미리 겨울눈을 만들어 두는데 개나리는 5월에 미리 겨울눈을 만들어 두기도 한다. 이듬해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려면 겨울눈이 꼭 필요하므로 양분이 많을 때 미리 만드는 것이다.

겨울눈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눈인지, 비늘눈인지, 눈이 쌓여 있는지 나무마다 그 모양이 다양하다. 생김새가 둥그스름하니 통통하기도 하고 가시처럼 뾰족하기도 하다. 겨울눈은 나무의 지문이라고 할 만큼 나무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겨울나무는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겨울바람에 겨울눈이 마르지 않고 얼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한 채 겨울을 보낸다. 목련은 우리가 겨울에 털코트를 입듯이 연회색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로 겨울눈을 감싸고 있다. 털코트 대신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고 있는 물푸레나무도 있다. 끈끈한 즙이나 번질거리는 기름 성분의 옷을 입은 칠엽수는 겨울눈에 부동액을 발라 둔 셈이다. 반면 전쟁에 출전한 장수처럼 비늘옷을 선택한 나무들은 여러 겹의 단단한 비늘조직으로 겨울눈을 싸고 있다. 마치 찬바람의 화살을 갑옷으로 막아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동백나무나 개나리, 진달래, 참나무류 등이 해당된다.

동백의 겨울눈과 꽃핀 모습, 광양
동백의 겨울눈과 꽃핀 모습, 광양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식물원에서는 겨울눈이 덮여 있는지, 싹트기 전 부풀어 올랐는지 등을 극한 기후 조건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100여개 수종 중 겨울철에 6일 연속으로 따뜻한 경우 그늘을 잘 견디지 못하는 양수와 관목 수종은 일찍 겨울잠을 깨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거나 갑작스럽게 늦서리가 올 경우 봄이 왔음에도 식물들이 생존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곤충류에게 너무 쉽게 먹히기도 한다. 겨울눈은 기후와 식물 연구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따른 식물과 곤충의 엇박자를 보여주는 지표로도 활용된다.

겨울나무는 추운 겨울, 잎을 모두 떨쳐버리고 연약한 겨울눈을 지키기 위해 춥고 건조한 악조건에서도 생명을 내걸고 싸운다. 가을의 풍족함에 만족하지 않고 새봄을 위해 인내로 만들어 낸 겨울눈은 희망인 동시에 생명의 축복인 셈이다. 만약 겨울눈 속의 꽃이나 잎이 없다면 다가올 봄에 광합성을 하지 못하니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우리의 삶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겨울처럼 춥고 시린 시간이 우리의 삶에도 계절처럼 자주 그리고 가끔은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봄의 희망 하나만 품고 춥고 힘든 겨울을 나는 겨울눈을 보며 우리도 움츠린 시간을 잘 견디고 준비한다면 따스한 봄볕에 새로운 잎과 꽃을 피우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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