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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만 되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굽은 허리를 더욱 굽혀 도토리 줍기에 여념이 없다. 아마 자식들에게 손수 만든 특별한 도토리 음식을 해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참나무에서 나는 도토리를 채집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 종류도 도토리 냉면, 도토리 빈대떡, 도토리묵, 도토리 수제비, 도토리묵 비빔밥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도시민들에게 가장 익숙한 음식은 도토리묵이다. 먹기는 쉬워도 도토리묵을 만드는 데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먼저 도토리를 잘게 빻은 후 물과 함께 고운 체로 거른 다음 소금물로 타닌을 빼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토리물을 걸쭉해질 때까지 불에 끓인 후 식히면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 세계에서 도토리로 음식을 해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나라도 떨어진 도토리를 보며 무슨 음식을 해먹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도토리로 만든 다양한 음식들
도토리로 만든 다양한 음식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도토리를 식재료로 이용해왔을까? 울산 세죽해변에서 발견된 도토리 관련 유적에서 약 6500년 전부터 도토리를 이용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도토리(Dotori)의 어원은 1417년 향약구급방에 저의율(猪矣栗: 돼지의 밤)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기록돼 있다. 이 용어를 풀어보면 ‘돝(돼지, 猪)’, ‘의(어조사)’, ‘톨(밤, 栗)’, 즉, ‘도밤’으로 불리다가 이후에 접미사 ‘이’가 합쳐져 도토리가 됐다.

참나무과의 도토리 열매 종류
참나무과의 도토리 열매 종류

역사적인 기록에서 발견되는 도토리는 구황작물로서 가뭄 등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매우 중요한 먹거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4년 8월 20일 세종은 ‘흉년에 대비해 일정한 수량의 도토리를 예비할 것’을 명했다. 양곡 생산이 좋지 않을 때는 구황(救荒)나무로 참나무, 즉 도토리나무를 심게 했다. 임원경제지 인제지(仁濟志) 편에는 민간에서 도토리나무를 심고 가꾸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본초강목에도 ‘도토리는 곡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실도 아닌 것이 곡식과 과실의 좋은 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 보신이 필요 없는 좋은 식품’이라고 적혀 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서도 ‘도토리를 쪄 먹으면 흉년에도 굶주리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도토리는 한국인의 배고픔을 채워주던 고마운 식재료였다.

전북 장수군 양신마을숲의 상수리나무
전북 장수군 양신마을숲의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중 상수리나무는 열매가 크기가 크고 양도 많다. 그래서인지 상수리나무는 높은 산이 아닌 해발 600m 이하의 인가 근처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인이 도토리를 즐겨 먹었던 역사와 관련 있을 것이다. 도토리나무는 매년 일정한 수량의 도토리를 맺는 것이 아니라 4~5년의 주기로 그 양이 달라져 도토리 생산량은 매해 들쑥날쑥하다. 홍릉숲에서 상수리나무의 도토리 결실량을 분석한 결과, 전년도 봄철이 가물수록 결실량이 많았다.

도토리는 사람 못지않게 동물들에게도 인기 있는 음식이다. 도토리가 우리에게 부식이라면, 다람쥐와 청설모 등 설치류에게는 주식이다. 특히, 이들에게는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이다. 우리는 도토리가 예쁘고 귀여워서 무심코 주워오지만, 복잡한 생태계의 다른 동물들의 먹이량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도토리를 활용한 음식문화도 전통지식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족한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가 이들의 먹이망을 지켜준다면, 산책 중에 동요 가사처럼 도토리 점심을 가지고 소풍 나온 아기다람쥐를 만날 수 있는 기쁨도 매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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