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랑구 신내동 새한아파트 김재원

탈무드를 보면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 어떤 사나이에게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했다. 그 사나이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대단히 우정이 깊어 항상 진정한 친구라 생각했다. 두 번째 친구는 친하긴 하지만 첫째 친구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이였다. 사자가 와서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은 사나이는 겁이 나고 무척 불안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가기로 작정하고 첫 번째 친구를 찾아가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단호히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다. 두 번째 친구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궐 문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두 친구에게 실망한 그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갔다. 그러자 세 번째 친구는 기꺼이 응하면서 임금님께 잘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금은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이고 대궐로의 부름은 죽음을 비유한다. 즉 인간이 이 땅에서 생명이 끝나 절대자 앞에 설 때 어떤 친구가 함께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우화다.

첫 번째 친구는 물질(物質) 즉 돈이다.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사랑하여도 저 세상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누구나 빈손으로 죽는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家族)이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들은 대궐문 앞인 무덤까지만 같이 간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善行)이다. 선행은 평소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후에도 늘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 친구는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함께한다.

최후에 남는 것은 돈도 가족도 아니고 이 땅에서 행한 선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없어질 친구에게 너무 집착하며 살아간다. 첫째 친구에게만 관심을 두고, 이 친구만 좋아하고 이 친구를 위해서 살고 이 친구 때문에 싸우고 원수가 되곤 한다. 우리의 삶의 무게를 옮겨 내가 죽을 때 유일하게 동행할 수 있는 세 번째 친구 즉 ‘선한 삶’이 진정한 친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만났던 한 상사가 떠오른다. 명절날 아침마다 차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그날 당직자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사가 있었다. 일반 직원들뿐만 아니라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청원경찰, 보일러실, 차량관리실, 미화원 등 10여명이 넘는 직원들의 식사를 일일이 챙겨왔다.

명절날 아침은 일반 음식점도 문을 닫아 아침 식사를 굶어야 할 때 차례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챙겨주던 그 상사야말로 작은 선행의 실천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은 해마다 반복된다. 우리의 생활공동체인 아파트 단지에도 곳곳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지 못하고 주어진 자리를 항상 지키고 있다. 추석이 지나갔지만 다가오는 명절과 연말은 이들에게 작은 선행의 손길을 뻗칠 좋은 기회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아파트관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