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석 교수와 함께 하는 역사와 현대 건축의 만남]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틴 세계문화유산

세 권의 책이 뉘어져 있는 듯한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모습
세 권의 책이 뉘어져 있는 듯한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모습

서구 문명의 발생지로서 고전 미학의 중심지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2700년의 장구한 세월을 넘어 유럽 문화 자체로 여겨지는 고대 건물들이 서 있다. 고대 아테네 사회에 끼친 영향이 너무 커 ‘아테네의 첫 번째 시민’이라고 불린 페리클레스(Pericles, 495 BC-429 BC)의 조율하에 해발 150m, 약 3만㎡의 면적에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리온, 아테나 니케의 신전 등이 오늘날도 방문객을 맞는다.

그중 고대 서구건축의 최고 명작으로 인정받는 파르테논 신전은 동로마 시대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대성당이 됐다가 15세기에 오스만이 그리스를 정복한 후로는 튀르키예 군대의 주둔 본부와 화약고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베니스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모란 전쟁 중이었던 1687년에 베네치아인들의 포격으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 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허물어진 건물들의 파편들은 방문자들이 주워가는 수집품이 됐는데, 19세기에 영국의 엘긴(Elgin) 백작이 파르테논의 지붕 부분을 장식했던, 손상되지 않은 많은 조각 장식물들을 가져간 것이 대표적인 반출 사례다. 1833년 튀르키예 군대의 철수 이후 언덕의 복원사업이 시작돼 1865년에 첫 뮤지엄을 지었으나 계속되는 발굴로 인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증가한 방문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인 엘긴의 대리석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인 엘긴의 대리석

1976년 신축 박물관을 기획하며 그리스는 반출된, 그리스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인 엘긴의 대리석들을 전시 중인 영국박물관에 반환을 요청했지만 ‘가져가 봐야 전시할 데도 없으면서’라는 빈정만 들었다. 자극을 받은 그리스는 네 번에 걸친 공모전 끝에 마침내 280m 떨어져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존중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조각물들을 보존하는 기술적 시설을 갖춘 현대 박물관을 얻게 됐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건립을 위한 3차 공모전 당선작에서 '파르테논의 눈'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는 개념을 보여주는 단면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건립을 위한 3차 공모전 당선작에서 '파르테논의 눈'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는 개념을 보여주는 단면도

1,2차 공모전에서 모든 제안이 대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 번째 열린 공모전의 당선안은 박물관 내부에서 3개 층에 걸쳐 일방향성 계단을 올라서 뒤돌아서거나 중간에 한 번 꺾어져 올라서는 긴 경사로를 다 오르면 정면에 반달형으로 뚫린 큰 창인 ‘파르테논의 눈’을 통해 파르테논을 올려다보이도록 계획돼 찬사를 받았다.

박물관 신축 대지에서 발굴된 유적들
박물관 신축 대지에서 발굴된 유적들

하지만 이 세 번째 공모전 이후 건설 예정 대지에서 고대부터 아테네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의 대규모 주거 유적이 발견돼 그대로 지어질 수 없었다. 2000년에 네 번째 공모전에서 당선된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는 대지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을 100여개의 굵은 기둥 위에 올렸다.

서구 문명의 출발점에 적용된 현대 철학

추미는 21세기 전후에 조각과 건축에서 나타난 ‘쌓기(empliement)’ 개념에 의거해 마치 세 권의 책을 바닥에 조금씩 엇갈리게 쌓아 놓은 듯한 혼성적 성격의 박물관을 제안했다. 근대 건축의 형태, 기능, 통접(conjontion)의 대안으로 이접(disjonction)과 이질성의 문제를 실험하고 작업한 추미는 도시적 충격, 충돌, 이접 같은 단편과 혼란이 오히려 도시 문화에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내려다본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내려다본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기존의 일반적인 건축 형태와는 구별되는 이 박물관의 차별성은 존중의 대상인 파르테논 신전에서 포착한, 명확한 표현으로 이룬 통일성, 빛과 그림자의 조형물로 결정화된 첨예한 순간이 빚은 무오하고 준엄한 윤곽, 수학적 질서가 주는 감동을 뮤지엄 프로그램의 공간적 중첩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데서 비롯됐다.

파르테논 신전을 향한 오마주

파르테논 갤러리에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파르테논 갤러리에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무작위로 놓인 것 같지만 제일 아래 볼륨은 기존의 도로망과 지하의 유적들을 감안해 자리 잡았고, 파르테논 갤러리라고 명명된 제일 윗 볼륨은 파르테논 신전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놓이기 위해 중간 볼륨보다 23° 돌려졌다. 행로의 중간 지점인, 주출입구 캐노피 위에 카페테리아가 있어 전시품 감상 도중에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올려다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전경
아크로폴리스 언덕 전경

관람의 종착점인 제일 위층 볼륨은 4면이 전창으로 열려 있는데 앞서 언급된,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는 ‘파르테논의 눈’에서 얻은 영감을 새 박물관에 맞게 반영한 것이다. 이 최상층 볼륨은 면적상 파르테논 신전의 면적과 평면상의 좌우 비율을 감안해 정해졌다.

이 갤러리 안의,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과 같은 간격으로 서 있는 48개의 기둥은 4면 모두 열린 전창 덕분에 외부에 서 있는 고대 신전의 느낌을 준다. 최상층의 전시공간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절정을 재현한 것이다. 난해한 현대 철학을 역사 그 자체인 장소에 적용해 해체된 관계의 변형을 통한 다의적 장소성을 추구한 신축 박물관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전성 속에 무난히 스며들어 긴 시간의 간격을 넘어선 건축의 성공적인 연속성을 보여준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아파트관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