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석 교수와 함께 하는 역사와 현대 건축의 만남]

국립 로마미술관의 중앙 전시공간
국립 로마미술관의 중앙 전시공간

고대 로마 도시 메리다

스페인 북부도시 메리다(Mérida)는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BC 27~AD 14)가 로마군의 서진(西進) 정책에 격렬하게 저항한 칸타브리아 전쟁에 투입됐던 두 군단을 정착시키기 위해 처음 형성됐다. 이곳에는 6000석 규모의 로마 극장, 1만5000석 규모의 원형경기장, 전차경기장, 로마 시대 수도교들, 디아나 신전과 트라야누스 개선문, 당시의 성벽 등 다수의 고대 로마 유적들이 남아 있다. 드물게 잘 보존된 이 유적들이 현대 도시와 조화롭다는 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의 주요 이유일 만큼 메리다는 과거와 현재가 잘 공존한다.

메리다의 라보 드 부에-산 라자로 수도교
메리다의 라보 드 부에-산 라자로 수도교

스페인의 변방도시인 메리다가 이후 주요 도시로 개발되지 않아 느리고 제한적인 도시 성장의 덕을 본 것이다. 이런 고풍스러운 도시 메리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전초기지가 된 지 이천 년이 된 기념으로 로마 극장과 원형경기장 이웃에 국립 로마미술관 건립이 결정됐다.

국립 로마미술관 외관
국립 로마미술관 외관

앞서 소개된 아를 고대사박물관처럼 구도심 전체가 이미 뮤지엄인 곳에 새로운 미술관을 계획해야 할 임무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에게 맡겨졌다.
 

국립 로마미술관의 천창 채광
국립 로마미술관의 천창 채광

고대 유적과 이질감 없는 현대 건축물

부담스러운 과업 앞에서 건축가는 고대 로마 유적 이웃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된 상황에서 고대 로마의 존재를 되찾게 해주는 미술관을 지어 과거의 로마를 상기시키고 환기할 방법을 모색했다. 둘 사이에 다른 구조물이 없이 원형경기장과 불과 97m 떨어진 위치를 감안해 닮음을 통한 동조의 방안을 택했다. 그 결과 새로 지은 미술관이 마치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 같다.

국립 로마미술관의 2층 전시공간
국립 로마미술관의 2층 전시공간

재료의 무거운 중량과 거친 질감, 인력 위주의 쌓기 작업 방식 때문에 근대 건축가들이 한때 사용을 꺼렸던 붉은 벽돌이 여기서 콘크리트로 된 외벽과 내벽 양면을 감싸 현대적 구조체계면서 마치 전통건축의 조적식 내력벽처럼 보인다.

고대 로마 건축의 전형적인 평면 형식인 바실리카(Basilica) 위에 일렬로 힘있게 반복된 내벽들이 고대 로마의 탁월한 성취물인 아치들로 뚫려 있어 로마 건축 특유의 웅혼함, 남성적인 힘이 느껴진다. 이 아치들 위의 섬세한 3겹 띠는 주변의 고고학 사이트에서 따왔다. 이렇게 고대 로마를 참조한 평면, 구조, 마감 재료와 디테일로 인해 먼 과거와 현대의 시간 간격을 확 줄였다.
 

메리다의 고대 로마 극장
메리다의 고대 로마 극장

고전적 의장 요소 차용과 확연한 현대성

국립 로마미술관은 이렇게 유럽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근에 신축된 뮤지엄으로는 드물게 의미형태론적 측면과 지역문화와의 연속성을 위해 역사와 전통 참조를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또한 현대적 감각도 입고 있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인 아치가 뚫린 얇은 벽의 벽돌 외피는 로마적이면서도 그 형상과 높은 시공 수준으로 인한 완벽한 한결같음과 가벼움에서 둔중한 고대 로마 건축의 구조체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렇게 닮았으면서도 다른 면모는 그곳에 넘쳐나는 자연광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구조체가 두꺼울 수밖에 없었던 과거 전축에서는 재료, 공간, 빛이라는 건축의 3요소 중 재료가 공간과 빛을 압도했었다.

반면에 여기서는 공간과 빛이 재료보다 더 중요해졌다. 현대 건축의 비물질화 속성을 지닌 것이다. 건축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건축상 모네오 수상 기념 회고전에서 나온, “계속 변하는 금빛 물결인 이곳 내부의 일광처리는 능숙하다. 이 빛은 전시 중인 고대 유물의 그림자 같은 창백함과 대조를 이룬다”라는 논평은 이 미술관의 주의 깊고 의도적인 일광 조절이 과거 건축의 체계 속에서 모네오 작품의 현대적인 정체성을 확인한다.

건축가는 이 미술관의 내외부 벽 같은 수직적 요소들이 보여주는 질감에서 고대 의장의 주요 요소들을 도입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모방하거나 풍자적으로 복원하지 않았다.

정밀하고 율동적이며 정교한 눈금이 있는 좁고 긴 벽돌 면들은 윤기 나는 금속 핸드레일과 메자닌층의 떠 있는 노출콘크리트 슬래브들과 짝을 이뤄 최신 건물들에서만 있는 세련됨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구조의 단순성과 그것의 명백한, 고대 로마 선례에의 호소는 시간을 초월한 뭔가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형태와 재료는 과거와 현재 모두를 연상시키며 오늘날의 고고학 미술관으로 기능한다.

닮음을 전제로 한 과거 건축에의 접근이 비교적 쉬운 방법 같지만, 그러나 현대 건축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은 이 미술관이 주는 교훈은 적지 않다.

메리다의 디아나 신전
메리다의 디아나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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