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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는 유난히 눈을 볼 수 있는 날수가 많고 한번 눈이 내릴 때마다 많은 양이 내리고 있다. 지난 12월 적설량은 서울 기준 19.9㎝로 체계적인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래 역대 5위를 기록했으며 최근 10년 동안 가장 많은 양이었다. 때때로 많은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눈사람도 만들고, 눈 덮인 길을 걸으며 ‘뽀드득, 뽀드득’하는 특유의 눈 발자국 소리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도시가 하얗게 뒤덮이는 날이면 우리는 비로소 계절로서 진짜 겨울을 만났다고 느낀다. 한편 첫눈은 야생동물에게 겨울나기를 준비하라는 신호이며 야생동물 연구자에게 겨울철 동물의 생활을 관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야생동물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겨울에는 먹을 것, 쉴 곳을 찾는 일이 가장 급선무다. 동물들은 눈 덮인 겨울산에서 먹을 것을 찾기 힘들어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오기도 하고 물을 찾기 위해 계곡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동물들의 다양한 겨울철 동식물 생활사에 대한 연구를 일컫는 ‘겨울나기 생태학(wintering ecology)’이라는 분야가 있을 정도로 동식물의 겨울철 생태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필자가 20년 전 강원 인제군 점봉산에서 연구할 때 남사면은 반들반들했지만 북사면은 눈으로 덮인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쥐들이 드나든 흔적이었다. 한겨울 기온을 비교해 보니 북사면의 평균기온이 남사면보다 더 높았고 아마도 추위와 찬바람에 적응하려는 동물들은 북사면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숲속의 동물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까? 체온 또는 대사율을 낮춰 추위에 적응하는데 기본적으로 겨울철에 지내기에 더 적합한 지역을 찾아 떠난다. 동식물이 눈에 어떻게 적응하는지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눈을 뜻하는 그리스어 ‘chion’을 따서 ‘눈 공포자(chionophobia)’, ‘눈 내성자(chionophores)’, ‘눈 애호가(chionophiles)’로 나눈다. 대부분의 야생동물 중 겨울이 되면 산 아래로 내려오는 생물은 눈을 좋아하지 않는 눈 공포자에 속한다. 겨울철에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찾아오는 검독수리가 그 대표적이다. 눈 내성자는 겨울에 적응하고 생존할 수 있으나 특별한 적응 방식이 없는 경우다. 등줄쥐, 흰넓적다리붉은쥐, 대륙밭쥐 등이 여기에 속한다. 눈 애호가는 겨울철 생활에 대한 적응력을 가진 생물로 지리적으로 한정된 영역에 분포한다. 겨울철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산양, 족제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뇌조와 스노우슈토끼는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눈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깃털과 몸색깔을 흰색으로 바꾼다. 토끼는 눈이 쌓여 있어도 활동하며 나무와 관목의 높은 곳에 올라가 먹이를 구하는데 눈이 녹고 난 뒤 숲에서 관목의 중간높이 줄기에서 토끼가 갉아 먹은 식흔을 발견할 수도 있다.

겨울철 계곡에서 만난 족제비의 배설물
겨울철 계곡에서 만난 족제비의 배설물

겨울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게 되면, 산은 눈으로 뒤덮이고 계곡은 꽁꽁 얼어붙고 생명의 움직임도 서서히 사라진다. 동물들은 활동을 중지하고 동면에 들어가는데 음식과 물을 섭취하지 않고 추운 계절에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신체 기능을 둔화시킨다. 이러한 겨울나기 전략의 핵심은 체온이나 대사율을 낮춰 무기력한 상태(torpor)를 유지하는 것이다. 동면은 짧은 기간 비연속인 휴면(diapause)을 하거나 길고 연속적인 동면(hibernation)으로 나뉜다. 오소리는 극도로 추운 날씨에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동면을 하는데 제주 사려니숲에서 5년간 관찰한 결과 오소리의 겨울철 활동기간은 기온에 따라 변화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땅다람쥐는 체온을 39도까지 떨어뜨리고 맥박과 호흡수 역시 4~6분에 한 번씩으로 그 횟수를 줄이기도 한다. 또한 많은 동면 동물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공 모양으로 몸을 웅크리기도 한다.

우리가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알고 있는 곰은 신체 활동은 느려지지만 다른 진정한 동면 동물처럼 체온이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진정한 동면은 아니라고 분류한다. 하지만 곰의 두꺼운 털은 표면적이 작아서 겨울을 더 따뜻하게 날 수 있으며 신진대사는 절반으로 떨어지고 소화 기관이 빡빡해져 제한된 노폐물을 재처리한다. 곰은 먹거나 마시거나 소변을 보거나 배변을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잠을 잔다.

쌓인 눈 아래의 공간에서 야생동물은 먹이도 먹고 겨울을 난다
쌓인 눈 아래의 공간에서 야생동물은 먹이도 먹고 겨울을 난다

동물의 먹이 또한 겨울철 생존에 필수적이다. 많은 작은 동물들은 겨울철 생존을 위해 눈 덮인 담요에 의존한다. 설치류는 눈속에 터널을 파고 들어가 식물의 씨앗이나 나무껍질 등 소량의 먹이를 저장하며 살아간다. 이는 올빼미를 비롯한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쥐구멍이라고 이야기하는 눈 표면의 많은 구멍은 실제로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다시 산소가 들어가서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한 통풍구 역할을 한다.

계곡의 숨구멍은 추운 겨울에 얼지 않아 야생동물에게 물을 공급한다,
계곡의 숨구멍은 추운 겨울에 얼지 않아 야생동물에게 물을 공급한다,

겨울은 배고픔뿐만 아니라 목마름도 해결하기 어려운 계절이다. 얼어버린 계곡에서 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계곡에서 물이 얼지 않는 물웅덩이가 있다. 작은 계류가 서로 만나는 합류점에서 중력의 힘으로 흐르는 물과 물이 만나는 지점인 숨구멍은 와류 에너지가 유지되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물론 기온이 더 내려가면 이곳에 흐르는 물도 언다. 그래서 법정 스님의 글 중 계곡에 가서 일부러 망치로 얼음을 깨서 야생동물이 물을 먹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동물은 숨구멍에서 물을, 눈 덮인 담요 아래에서 식물의 씨앗, 껍질 등을 먹고 겨울잠을 자면서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우리 인간은 설피를 이용하기도 하고 동물의 털을 이용한 털옷, 털장갑, 털모자를 이용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왔다. 한겨울 고요한 뒷산에도 크고 작은 생명들이 긴 겨울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각자의 겨울나기 방식으로 겨울을 나보면 좋겠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법이니까.

첫눈이 오면 다양한 야생동물의 발자국을 만난다
첫눈이 오면 다양한 야생동물의 발자국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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