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석 교수와 함께 하는 역사와 현대 건축의 만남]

구시가지 전체가 박물관인 아를

아를의 구시가지와 론 강
아를의 구시가지와 론 강
고흐가 밤의 테라스를 그린 '반 고흐 카페'
고흐가 밤의 테라스를 그린 '반 고흐 카페'

지중해에서 약 10㎞ 북쪽에 위치한 프랑스 남부의 고대 로마 도시 아를의 구시가지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의 고대 로마 유적들과 12세기 중세의 도시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프랑스 고고학의 보물창고다. 1981년에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됐다. 기원전 46년에 로마 군단이 북진의 발걸음을 멈추고 이곳에 북지중해의 거점도시를 건설했을 만큼 아를의 풍광은 아름답고 햇살은 눈부시다. 그 파란 색조와 밝은 색채에 반한 화가 반 고흐는 자신의 영혼을 고무하고 화풍에 생기를 불어넣을 유일한 횃불로 이곳을 찾아 444일간 머물며 다수의 걸작을 남겼다.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아를의 여인’ 중에서 귀에 익은 미뉴에트의 플루트 연주를 들으며 걷는 아를의 오래된 골목에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신념을 남방 프랑스어로 노래한, 19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미스트랄의 다감하고 풍부한 연상이 넘쳐난다.

아를의 옛 골목과 오래된 집들
아를의 옛 골목과 오래된 집들

유럽 최초의 박물관 중 하나인 아를 박물관을 포함해 옛 건물들이 박물관으로 여럿 개조됐지만 계속 발굴되는 유물들을 보관하고 보여줄 장소가 늘 부족했던 아를은 새로운 박물관 건립에 나섰다. 신축 박물관을 위한 대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아를 방어벽 바로 너머에 프랑스에서 유일하며 지금도 발굴 중인 고대 로마 전차경기장이 있는 삼각형의 대지가 선정됐다. 이 전차경기장 유적과 불과 7미터 떨어져 뒷배경으로 건립될 새 박물관은 기존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과 산재된 고대 로마의 기념물들 사이에 지적·시각적 연계성을 갖게 하고 보존구역인 구시가지와 이후 확장된 신시가지 사이의 연속성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발굴 중인 고대 로마 전차경기장과 근접한 아를 고대사박물관 배치도
발굴 중인 고대 로마 전차경기장과 근접한 아를 고대사박물관 배치도
아를에 있는 고대 로마 원형극장
아를에 있는 고대 로마 원형극장

삼각형 평면, 고전성과 공존하는 현대성

아를 고대사박물관의 건축적 형상인 전시대
아를 고대사박물관의 건축적 형상인 전시대

아를 고대사박물관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이던 1980년대 초반에 골수 모더니스트인 건축가 앙리 시리아니가 고대 로마와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에 어떤 현대 건물을 심을 수 있을지를 고심한 결과물이다. 이 박물관의 평면은 실제 건물로는 드문 정삼각형이다. 형태를 우선한 건축을 혐오하는 시리아니의 건축 성향상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건축가는 이웃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건축의 장식성 같은 겉모습이 아닌 원형과 정방형, 장방형이 주류를 이루는 로마건축의 기하학적 단순성(이것은 현대 건축의 주요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을 직시해 그 남성적인 힘을 견지하면서도 과거에는 없었던 삼각형을 직감적으로 떠올렸다. 아를 구시가지의 고전성과 상충되지 않으면서도 현대 건물로서의 정체성은 지키기 위함이었다. 대지의 상황과 프로그램도 삼각형에 호응했다. 론 강과 시내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 고대 로마 전차경기장 유적으로 경계를 이루는 대지 모양부터 삼각형이었다. 여기에 과학구역·문화구역·전시구역 세 가지로 대별되는 프로그램이 삼각형의 한 면씩을 차지했다. 삼각형 평면은 공모전 설계지침서에서 요구된, 내부 동선의 용이함, 경제성, 전시에서의 유연성, 기후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형태에 적합한 제안으로 인정받았다. 대지 형상, 프로그램의 특성과 설계지침서 상의 요구에 집중하면서 로마건축의 장식적 외관이 아닌 그 건축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서 현대 건축과의 접합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찾아낸 것이다.

가야할 방향의 안쪽 벽이 붉게 칠해진 전시공간
가야할 방향의 안쪽 벽이 붉게 칠해진 전시공간

에말리 블루
고대 대리석의 현대적 해석

길이 130m, 높이 9m인 삼각형 박물관 세 입면에 설치된 외장재로서 콘크리트 벽과는 이격된 채 유리의 안쪽 면이 파랗게 채색된 에말리 블루는 인접한 론 강의 흐름마저 바뀌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거친 아를을 변함없이 지킨 하늘을 상징한다. 이 광택 나는 유리는 로마의 기념물들에 시각적 풍부함을 가져다준 재료인 대리석에 해당하는 현대적 재료로 제시됐다. 지금은 모두 벗겨졌지만 고대의 대리석 벽에는 여러 가지 색들이 채색돼 있었다. 오늘날의 유리가 빛 아래 반짝이는, 과거의 채색된 대리석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 박물관은 전시공간 입구 바로 좌측에 전시공간 출구가 있어 깊숙한 안쪽까지 들여다보인다. 이 출구를 통해 전시공간에 들어가 자유롭게 거닐면서도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임을 알려주는, 자연광의 세례를 받는 커다란 붉은 벽의 인상을 뇌리에 새기기 위함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많은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들도 모두 색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이곳저곳에 놓인 전시대에 여러 색이 들어간 이유인데, 형형색색이었을 과거의 모습이 궁금하다.

전시품의 출처 바라기

'건축적 산책'의 종점으로 전차경기장과 구시가지 및 론 강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 전망대와 테라스
'건축적 산책'의 종점으로 전차경기장과 구시가지 및 론 강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 전망대와 테라스

삼각형 박물관에서 삼각형 평면인 전시공간의 한 면은 자연풍광 안에서 유유히 흐르는 론 강을 향해 유리로 열려 있는 반면에 나머지 두 면은 과학구역과 문화구역으로 닫혀 있다. 전시공간에서 관람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전시공간 이외의 내부 이동 중에는 여러 곳에서 전시품의 출처인 구시가지를 바라볼 수 있게 배려돼 있다. 길고 평탄한 주입면에 위치한 입구홀에 큰 창이 있고, 2층에서는 휴식(카페테리아), 일(박물관장실의 발코니), 지식(도서실)을 상징하는 세 개의 흰 볼륨이 전차경기장과 구시가지를 향해 돌출해 있어 전시물 출처로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순로의 종점도 과거를 향해 있다. 전시공간에서는 대부분 온전하지 않은 파편들인 전시물들을 모델로 삼고 건축적 공간의 응고되고 시간을 초월한 모습을 대위법으로 해 미완성의 형태를 지닌 전시용 가구들이 각자의 색을 지닌 채 공간에 운율을 주고 동선을 지시한다. 북향으로 열린 톱날지붕고측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 속에서 전시물을 감상한 후 전체 삼각형 평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삼각형 중정의 계단을 통해 이르는 옥상 전망대는 ‘건축적 산책’의 종점이다. 여기서 방문객은 지금까지 봐온 전시품들의 출처를 바라보며 꿈결 같은 지난 시간 앞에 숙연해진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양편의 삼각형 측벽은 박물관의 긴 수평적 입면보다 두 배 높이로 치솟은 수직적 요소로서 로마건축의 종탑을 연상시킨다.

아를 고대사박물관의 주입면과 아를의 하늘
아를 고대사박물관의 주입면과 아를의 하늘

아를 고대사박물관에서 대지의 특수성이 신축 박물관 계획의 개념이자 특성이자 장점이 됐다. 특출난 과거를 흉내내지 않고 굴종하지도 않으면서도 존중하고 현대 건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 가장 고전적인 환경에 잘 어우러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저작권자 © 아파트관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