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의 온고지신의 조경문화〈5〉

조선시대 사극에 ‘종묘사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이를 잠시 살펴보면 한 나라를 움직이려면 그 국가의 이념(이데올로기)이 있어야 했고 근대국가 이전에는 종교가 그 역할을 했다. 14세기에 건국한 조선은 국가의 이념이 유교였고 국가에 맞는 종교시설로서 종묘와 사직이 있었다.

종묘는 태조 이성계 이래로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교 국가의 사당과 같다. 이 종묘는 그 엄숙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인정받아 우리나라 최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대부분 서울시 내 4대 궁궐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종묘는 아직 방문해 보지 못한 이가 방문해본 이보다 많을 정도로 서울 도심에 꼭꼭 숨겨져 있는 비밀의 정원과 같은 곳이다. 단풍의 가을, 함박눈이 내린 겨울, 보슬비가 내리는 여름, 진달래꽃이 핀 봄 등 4계절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정전의 설경
정전의 설경

종묘는 조선 건국 후 1395년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렸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조·부)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했다. 이후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과 ‘조천’의 예로 신주를 모시게 됐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 때 정전에 처음 신주가 모셔지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신다. 그러다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됐다.

영녕전
영녕전

조선의 27대 왕 순종이 입실하게 되며 현재의 정전 19실은 만실이 됐고 영친왕이 자리해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모두 차게 됐다. 조선왕조의 끝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왕조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종묘는 시작에서 끝까지가 117m로 세계에서 가장 진 목조 건축물이다. 정전 앞에서 서면 그 엄숙하면서도 그 멋에 잠시 멍하니 잡생각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 건축가들 역시 전부 이 종묘에 감동했다고 전해졌다.

캐나다 출신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는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만약 있다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이나 있을까”,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빈켈만은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라고 평가했다.

향대청 전면의 중연지의 원도 내 향나무
향대청 전면의 중연지의 원도 내 향나무

종묘의 외대문(정문)을 지나 종묘 경내에는 망묘루, 향대청, 재궁, 전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① 망묘루: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종묘제례 전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옆면 2칸의 구조로 건물 중 두 칸은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② 향대청: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또 종묘제례 시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기도 하다.

③ 재궁: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왕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각 실에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였다.

④ 전사청: 종묘제례에 올리는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집기들을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8년(광해군 즉위)에 다시 지어졌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전사청 앞에는 제상에 올리기 전 제례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찬막단과 제수할 희생(소·양·돼지)을 검사하는 성생위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사청 서쪽에는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머물렀던 수복방이 있다.

⑤ 정전: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27개월)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은 ‘세실’과 ‘조천’의 예에 따라 ‘세실’로 지정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 때 왕과 제관들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 등이 출입한다. 건물 앞에 있는 넓은 월대(109m×69m)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깔려있다. 정전은 1985년 국보로 지정됐다.

영녕전: ‘세실’과 ‘조천’의 예에 따라 정전에서 ‘조천(신주를 옮김)’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1421년(세종 3)에 새로 지은 별묘로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영녕전의 구조는 가운데 4칸이 태조의 4대 조상인 추존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의 협실 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셨다. 1985년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종묘 내에는 공신당(배향공신의 신주를 모신 곳, 총 83명의 배향공신), 칠사당(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져 일곱의 신을 모시고 사계절마다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공민왕 신당(고려 31대 왕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전·영녕전 악공청(종묘제례 때 악공과 일무원들이 대기하는 건물) 등이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2001년 5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옛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됐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조선시대 유교 예법에 따라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오례의 중 길례에 속한다. 종묘제례는 왕이 직접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 왕을 비롯한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 등 제관이 참가했다.

종묘제례는 현재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과 매년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 지내고 있다. 아직 종묘를 방문하지 못한 이들은 5월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조선왕조의 얼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5월에는 정전도 공사가 완료되기에 장중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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