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의 온고지신의 조경문화〈3〉

조선왕조 5대 궁궐의 으뜸으로 조선 개국 당시 창건된 법궁이며 ‘대대손손 큰 복을 누리고 번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경복궁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한 번쯤은 방문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270여년간 폐허로 방치되다 왕권 강화를 꾀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조선왕조 500년 굴곡의 역사 속 건물 곳곳에 보이는 상징물마다 숨은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양옆에는 이마에 뿔이 달린 해치가 입장객을 처음 맞이한다. 해치는 예로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재주가 있다는 상상의 동물로 죄지은 자, 불온한 생각을 하는 자의 접근을 금함을 의미한다. 광화문 상단에 위치한 3개의 홍예문 중 가운데 홍예로 임금의 가마가 이동했고 좌우로는 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했다. 광화문은 출입문의 역할뿐만 아니라 높게 쌓아올린 석축 문루에 종을 걸어서 백성에게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치
해치

광화문 안쪽부터 본격적인 궁궐이 시작되고 넓게 펼쳐진 마당과 첫 번째 문인 흥례문이 보인다. 흥례문은 1912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의 만행으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위해 철거됐다가 해방 이후에는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 작업에 들어가 1997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며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작업 중 하나로 불과 20여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흥례문이 복원됐다.

철록
철록

흥례문 안쪽에는 바깥에서 나쁜 기운이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천이 가로로 흐르고 금천에 놓인 영재교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엄격한 임금의 공간이 펼쳐진다. 영재교 난간 양쪽 엄지기둥을 살피면 4마리의 석수(사악한 기운이나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지킴)가 위치해 있다. 금천 기슭에 놓인 석수는 철록이라는 상상의 동물로 물길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고 있는데 험악함은 찾아볼 수 없고 민화에 나오는 해학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봉황이 새겨진 답도
봉황이 새겨진 답도

영재교를 건너면 근정문이 보이는데 근정문 앞 계단에는 봉황이 새겨진 답도가 그려져 있으며 이를 지나면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이 있다. 근정전 앞마당은 조정으로 정기회의나 왕실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됐으며 바닥에 꽤나 거칠고 비뚤어지게 놓인 화강암 박석을 깔았다. 이로 인해 여름날 내리쬐는 햇빛에도 거친 표면의 난반사로 눈부심을 막고 비 오는 날 박석 사이 틈새로 물이 빠져 신하들의 가죽신 미끄러움을 방지했으며 신하들은 늘 바닥을 살펴 걷게 되면서 저절로 경건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박석의 다양한 쓰임새를 통해서도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화강암 박석
화강암 박석

조정 바닥에 좌우로 문무관의 품계석들이 놓여 있으며 근정전에 가까울수록 높은 벼슬인데 정이품 품계석 옆에는 쇠고리가 박혀 있다. 용도는 의궤도(궁중 행사 그림)를 보면 햇빛 가림 그늘막을 칠 때 끈을 고정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고위 관료들만이 그늘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니 참 출세하고 봐야 할 일이다.

앞마당을 지나 근정전으로 오르면 월대라 불리는 2층 돌기단이 있고 안쪽 상월대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방신(동서남북)이 배치돼 있다. 상월대의 나머지 기둥과 하월대는 12지신(시간)이 놓여 있으나 개와 돼지는 찾을 수 없으며 용은 근정전 천장 중앙에 오색구름 속 황룡(임금) 한 쌍이 보인다. 이는 발이 7개인 칠조룡으로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용보다 발톱이 2개 더 많은데 어떻게 조각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쇠통 드무
무쇠통 드무

근정전에서 내려올 때 계단 주변을 잘 살펴보면 둥글넙적한 무쇠통 드무가 있다. 물을 담아 건물 주위에 배치해 화재 시 불을 끄는 용도인데 겨울철 불을 지펴 얼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불을 끄는 실용적 기능보다는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에 놀라 도망간다’는 주술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조선시대 목조 건물의 백미로 꼽히는 경회루에서도 화마로부터 안녕을 기원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경회루는 음주, 가무를 즐겼던 장소로 연산군은 기생 조직인 흥청(돈이나 재물을 마구 쓴다는 의미의 흥청망청의 어원)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1997년 경회루 보수공사 중 연못에서 커다란 용 조각이 발견됐는데 고종 때 기록된 경회루 영건일기에 따르면 화재를 제압할 목적으로 물을 다스리는 영물인 용을 연못에 침수시켰다고 한다. 용 덕분인지 경회루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에도 무사히 살아남았으며 이 용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경복궁은 임금의 정치 공간인 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크게 구분한다. 그중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은 내전의 핵심 건물로 9칸의 방으로 구성돼 임금은 한가운데 방에서 수면하고 나머지 공간은 상궁과 나인들이 곁을 지켰다. 중전과의 합궁을 위해선 임금도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 중전의 침전인 교태전을 찾아야 한다. 양의문 안쪽에는 걸쇠가 달려 있고 임금이라 해도 중궁에서 걸쇠를 풀어줘야 교태전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내전 역시 1917년 화재로 창덕궁 침전이 불에 타자 일제가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는 등 수차례 굴곡을 겪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됐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는데 광화문부터 근정전, 강녕전, 사정전,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 좌우로는 경회루, 소주방과 같은 부대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 위치한 건물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동궁이다. 떠오르는 태양, 즉 왕세자를 위한 공간이다. 동궁의 역사는 세자를 향한 마음이 누구보다 세심했던 임금, 세종이 자선당을 지으면서부터 시작됐고 효심이 깊었던 문종은 즉위할 때까지 무려 28년 동안을 동궁에 머물렀다.

이처럼 경복궁은 조선왕조 제일이라는 수식어로 표현될 만한 궁답게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존재했으며 미로처럼 빼곡히 들어서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비록 일제 강점기 등의 외란으로 많은 전각이 파괴됐지만 현재까지도 복원을 거쳐 차곡차곡 쌓인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글이 경복궁 구조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복기하며 경복궁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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