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의 온고지신의 조경문화〈4〉

성종 때 만들어진 창경궁의 탄생 배경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관련돼 있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건국 시작부터 법궁이던 경복궁의 보조 궁궐 역할을 했지만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기거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점점 왕실 가족이 늘자 성종은 왕실의 어른인 정희왕후 윤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 등 세 명의 대비를 위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지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돼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도 궁궐로서 완결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자체로도 궁궐로써 필요한 공간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서 명정전까지는 그 규모나 격식 면에서 창덕궁보다는 격이 낮게 조성돼 보인다.

통명전 입구
통명전 입구

기존 궁궐과 차이를 찾아보면 첫째로 건축 방식보다 터의 형세를 존중하며 자연에 순응해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평지 위 일직선 축을 이룬 구획으로 조성된 경복궁과 달리 서쪽으로 담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창덕궁과 비슷한 지면 형태인 평지와 언덕으로 이뤄졌다.

둘째로 첫 번째 특징이 반영된 전각을 지어 공간과 배치의 미학이 아름다움 자연의 형세를 따른 궁궐 건축물 사이 동선의 자유로움도 느낄 수 있다. 또한 정사가 아닌 더 넓은 생활공간 확보를 위해 탄생한 궁궐이다 보니 전각 수가 적고 소담스러운 규모에서 드러나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풍수지리적으로 북악(北岳)의 한 줄기가 내청룡(內靑龍)의 지세로 남향해 뻗은 완만한 산줄기 중간에 자연지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했다. 동쪽으로는 명당수와 원경인 낙산이 있고, 남·북은 구릉으로 위요(圍繞)돼 배산임수(背山臨水)로서의 입지조건이 건물 좌향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창경궁의 중요 홍화문과 명전전 등 정전들은 동향을 취하고 있으며 내전에 많은 전각들은 남향을 취하고 있다. 북, 남, 서는 구릉지역이라 평지인 동쪽을 향해 배치된 특징을 볼 수 있다.

홍화문 명정문 전경
홍화문 명정문 전경

창경궁의 건축물 배치를 살펴보면 창경궁의 공간구성은 고문에 해당하는 홍화문과 치문에 해당하는 명정문, 노문에 해당하는 빈양문을 중심으로 홍화문에서 명정문에 이르는 외조공간, 명정문에서 빈양문 사이의 치조공간, 빈양문 내의 연조공간으로 구분된다.

창경궁의 중심에는 명정전이 위치한다. 명정전을 중심으로 후면에는 편전(임금 정사 장소)인 문정전, 함인정, 환경전, 경춘전, 중궁전인 통명전이 위치하고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에 이르는 일원은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공간으로 통명전의 동쪽에는 양화당과 영춘헌, 집복헌 등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창덕궁 소관인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구역도 실제로는 창경궁에 포함되는 주거·생활공간이었다. 창경궁 원유 공간에 관한 기록에는 치조 공간인 명정전과 문정전이 있는 월랑 내 마당에 박석을 깔았으며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시내가 위치해있는데 이 위에 옥천교라는 석교가 놓이고 어구 주위에는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을 식재했다.

집복헌 영춘헌
집복헌 영춘헌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침전이 있는 연조공간은 전통조경 기법인 지당, 샘, 화계, 괴석, 괴목, 기물, 누정, 화담, 굴뚝에 이르기까지 이용됐다. 통명전 일원에는 아름다운 석지 및 석교가 조영됐으며 석지 속에 괴석과 함께 붕어, 잉어 등을 기르고 수련을 띄우기도 했다. 통명전, 양화당, 경춘전, 여휘당, 집복헌, 영춘헌 후원의 경사진 곳에는 화계를 조성했고 성종조에는 통명전 언덕 북쪽에 환취정을 조영했다. 효종조에는 공주들을 위해 현 영춘헌 동북쪽에 건립됐던 건물 주위로 화담이나 괴석 등 내원을 조성했으며 현종 조에는 현 낙선재 후원에 위치한 취운정 주변에 괴석, 괴목, 화담 등을 배치했다.

대춘당지 전경
대춘당지 전경

그 중에서도 후원권역은 ‘동궐도’ 등을 보게 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구분되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창경원이 조성되면서 나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후원권역은 춘당지와 대온실이 중심지역으로 1980년대 창경궁 중건 공사 시에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됐으나 대온실은 근대건축물로서 가치가 인정돼 등록문화재로 제83호로 지정돼 남아 있다. 현재 후원권역에 남아 있는 건물은 관덕정과 통명전 앞에 있었던 건립 연대를 알 수 없는 사모정이라는 정자가 옮겨져 있다.

창경궁의 훼손과 보수 또한 다른 궁궐과 같이 순탄하지 않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1592년)으로 완전히 불탄 후 광해군에 의해 중건됐으나 인조반정 이후 일어났던 ‘이괄의 난’으로 다시 상당히 훼손돼 서궐로 지어졌던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다 옮겨 짓는 방식으로 궁궐을 보수하며 인조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이어했다. 순조 30년(1830) 화재로 다시 크게 훼손된 이후 수리를 거친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박물관으로 담이 헐리며 내전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활용돼 창경원으로 격하됐다. 남쪽에 동물원과 북쪽에 식물원 등이 설치돼 일반인에게 역사 속 장엄한 문화재 보다는 유원지로의 즐거움과 휴양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개방되기도 했다.

또한 창경궁은 ‘의녀 대장금’, 왕비와 후궁의 질투를 다룬 ‘장희빈’과 ‘인현왕후’, 부자의 슬픈 사연이 깃든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 국내 드라마 및 영화의 소재로 왕실에 애증 어린 역사와 궁궐 안의 다양한 콘텐츠 스토리를 품은 장소로 스크린에 비춰졌다.

해방 후에도 희생은 끝나지 않았으며 고속 산업화의 서울에 부족한 휴식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희생이 강요됐고 1980년대 중반에서야 ‘창경궁’이라는 본 연의 이름과 위상을 찾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찾은 것은 이름뿐으로 궁으로서의 위용과 자태는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현재의 창경궁은 약간 복원된 모습이지만 고난을 견뎌낸 세월과 역경만큼 그 속에서 숨 쉬던 모든 이들의 주거공간이자 최고의 관공서, 박물관, 유원지로서 아낌없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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