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먹어라’는 대표적인 욕 중 하나로 분류된다. 최근 들어서는 ‘빅엿’ 처럼 영어와 혼용된 합성어로도 사용된다. 사실 이런 표현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다가 어느날 문득 왜 ‘엿 먹으라’는 표현이 욕이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군것질거리가 거의 없던 그 시절 리어카에 강냉이와 엿을 싣고 와서 이 귀한 군것질거리를 빈병이나 고물들과 바꿔주던 고물상들이 있었다. 이 고물상이 방문하길 학수고대하며 빈병이며 고물을 열심히 모았었다. 그런데 강냉이보다 엿이 단연 비싸 빈 병 몇 개에 강냉이는 풍성하게 줬었지만 엿은 고작 작은 토막만 바꿔주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늘 강냉이가 거래 대상이었고 그 달짝지근하고 맛있는 엿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귀한 엿이었으므로, ‘엿 먹어라’는 것은 사실 그 시절엔 절대 욕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을 품은 채 최근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의문이 명쾌하게 풀렸다. 다음은 ‘교육의 기적’이란 책에 나온 내용을 대충 옮긴 것이다.

1968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정책이 실시됐다. 그 이전엔 중학교도 시험을 봐 들어가야 했다. 사교육 열풍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이는데 중학교 진학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다보니 중학교 입시 과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무즙 파동’이다.

1964년 12월 서울시 중학교 입시 문제에 ‘밥으로 엿을 만들려고 한다. 만약 엿기름이 없다면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당시의 문제의 보기로 4가지가 제시됐다. 1번 디아스타제, 2번 무즙, 3번 꿀, 4번 녹말로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 였지만 논란이 발생했다. 2번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 자연 교과서에는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었다.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가 ‘디아스타제’만 정답이라고 하자 학부모들이 교육청으로 대거 몰려갔다. 결국 이 논란은 ‘무즙 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재판부는 “실제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는지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한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바, 원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 내렸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기어코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냈다. 이 일로 ‘엿 먹어라’는 말이 당대 유행어가 되고, 1964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무즙 엿 먹어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결국 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38명의 학생이 구제됐다. 그러나 추가 입학의 어수선한 과정을 타 부정 입학자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 특권층과 부유층 자재로 밝혀지면서 자식을 부정 입학시킨 고위공무원들이 대거 해임되고, 서울시 교육감과 문교부 차관도 파면되는 희대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후 1967년 경기중학교 입시 문제에서도 복수정답 인정을 둘러싼 사태가 벌어졌고, 어린 학생들을 치열한 입시경쟁에 더 이상 내몰 수 없었던 당시 정부는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했다.

그러니 정확히는 ‘엿 먹어라’는 욕에는 앞에 ‘무즙’이 생략된 것이다. 정확히 구사하려면 ‘무즙으로 만든 엿 먹어라’ 또는 ‘무즙 엿 먹어라’가 욕이 된 시발점이 되겠고 우리나라 교육사의 슬프고도 웃긴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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