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발발한 1937년 준공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의 현재 모습. 잦은 소유권 변경과 법률 분쟁 등으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받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김선형 기자]
충정아파트의 현재 모습. 잦은 소유권 변경과 법률 분쟁 등으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받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김선형 기자]

[아파트관리신문=김선형 기자] 경복궁 정문을 나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면 세종대왕 사거리가 펼쳐진다. 그리고 세종대왕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큰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충정아파트가 있다. 걸어서는 약 40분, 차로는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한때 경복궁 바로 앞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도 비슷하게 걸렸을 것이다. 

식민지 서울의 아파트 열풍 속에서 탄생

충정아파트가 준공된 것으로 추정되는 1937년 8월 29일은 서울에 아파트가 한창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다. 매일신보 1937년 6월 5일 판에서는 ‘소방, 위생상의 불비로 위험한 여관아파트 시내 39개소 조사의 결과 개선 구제책 강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아파트와 여관업이 호경기를 맞았지만 보건위생의 측면에서 우려가 된다”며 “여관을 제외한 아파트 형식을 갖춘 39곳의 숙사를 조사해보니 노후하고 소화전마저 갖추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어서 1035명의 아파트 거주자가 보건위생과 화재에 무방비한 상태”라고 우려를 표했다. 즉 서울 시내에 공식 집계된 아파트만 해도 39곳에 달했다는 말이다. 

1930년대에는 일자리와 근대문물 학습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학부 교수를 역임한 고 손정목 교수의 저서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에 따르면 1926년 서울의 주택 부족률은 5.77%였는데 1935년에는 22.46%에 달했다. 결국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아파트가 주목받았고 많은 민간 자본이 투입됐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인해 건축자재 품귀현상과 급격한 물가상승이 발생했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임대료를 규제했다. 결국 1930년대 말에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던 아파트들은 호텔로 운영방식을 바꿨다. 충정아파트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충정아파트의 원래 이름은 ‘도요타 아파트’다. 건축주인 ‘도요타 타네오’의 이름을 땄다. 도요타 타네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풍전종손(豊田種松)이어서 풍전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4층 높이 콘크리트 건물로 당시로서는 최고급 건물에 속했다고 한다. 충정아파트도 당시 다른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기간에 호텔로 업종을 변경했다. 

반공의 아버지 사건으로 세간의 큰 화제 되기도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고 충정아파트는 미군에 인수돼 ‘트레머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유엔군 전용 호텔로 사용됐다. 1962년 5월 1일. 김병조라는 인물이 충정아파트의 관리권을 취득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김씨는 6·25전쟁에서 6명의 아들이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이에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박정희 의장이 충정아파트의 관리권을 김씨에게 넘기라고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원래 소유권은 미군에게 있었으나 정부가 미군에 김씨의 이야기를 전하자 미군 측은 “미국에서는 한 가정에서 전사자를 낸 최고 기록이 4명인데 6형제를 조국에 바친 김 노인의 이야기에 감동했다”며 수리까지 말끔하게 해서 건물을 넘겨줬다. 김씨는 “나라에서 준 건물이니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외화벌이를 위해 관광호텔을 만들겠다”며 건물 이름을 ‘코리아관광호텔’로 바꾸고 5층에 가건물을 증축했다. 

그러나 4달 후 김씨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났고 호텔은 폐쇄됐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쌀 배급을 타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 일이 커졌다”고 진술했다. 이후 여러 차례 건물주가 바뀌면서 건물의 이름도 70년대에 유림아파트, 80년대에는 충정아파트로 불리게 됐다. 

1962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 김병조씨 사기 사건을 크게 다뤘다. 사진 속에는 당시 충정아파트의 모습도 보인다.
1962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 김병조씨 사기 사건을 크게 다뤘다. 사진 속에는 당시 충정아파트의 모습도 보인다.

1979년 충정로 왕복 8차선 확장 공사를 하면서 건물의 3분의 1가량이 철거됐다. 정부에서는 전면 철거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건물주가 여러 차례 바뀌는 과정에서 입주자의 법률관계가 복잡해지자 도시계획에 걸린 19가구만 철거했다. 

한동안은 건물 일부분이 철거된 상태로 방치되기까지 했는데 철거된 부분에 거주하던 주민 중 일부가 충정아파트의 공용공간을 점유하면서 복도와 계단을 새롭게 만들었다. 2008년 충정아파트가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재개발 대상이 됐으나 기존에 살던 세대, 사기범 김병조가 증축한 5층 거주 세대, 1979년 아파트 일부분 철거 이후 공용공간을 점유한 세대 등의 법률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보상금 지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재개발은 무산됐다. 

역사성 고려해 보존도 논의됐으나
안전 등 문제로 2022년 철거 결정

그리고 2022년 6월 15일 충정아파트의 철거가 결정됐다. 한때 역사적 가치 등을 이유로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안전진단에서 E등급(즉시 철거) 판정이 나왔고 입주민들도 악취, 외벽 일부 붕괴, 침수 등 불편을 호소해 철거가 확정됐다. 일부 언론에서는 철거 확정 사실을 보도하면서 충정아파트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소개했으나 회현동 미쿠니아파트를 국내 최고령 아파트로 보는 의견도 있다. 

충정아파트 중정에서 내부를 올려다본 모습 [김선형 기자]
충정아파트 중정에서 내부를 올려다본 모습 [김선형 기자]

충정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는 28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다만, 같은 위치에 충정아파트의 역사성을 담은 공개공지를 조성한다. 일제강점기의 주거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정 등의 양식이 보존 의미가 커 3D 스캐닝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해 기록을 보존할 계획이다. 충정아파트 정비사업은 현재 추진위원회 설립 단계다. 본격적인 이주 및 철거까지는 앞으로 2~3년 정도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기록을 마치며...

충정아파트의 86세 생일을 10여일 앞둔 광복절에 충정로를 찾았다. 28년 전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가 시작됐던 날이기도 하다. 불과 10분 거리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탄생부터 역사의 중앙 무대에 나서 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 국회의사당, 정부종합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며 권력의 중심부와 함께했지만, 충정아파트는 중일전쟁, 6·25전쟁, 군부독재와 재개발 열풍이 몰아쳤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권력의 변두리에 자리했다. 

권력과 함께하며 세심하게 관리를 받았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철거됐고, 역사적 상징성은 있으나 권력과 멀리 있어 제대로 관리받지 못했던 충정아파트는 안전 문제 등 기술적 이유로 철거가 결정됐다는 사실이 묘하게 역설적이다. 만약 건물에도 영혼이 있다면 두 건물은 곧 만나게 될 텐데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하긴 하지만 거기까진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으니 기록으로 미뤄 짐작할 뿐이고, 미뤄 짐작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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