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자율성, 그리고 선택권. 현대 민주사회의 특성이며 민주주의가 발현될 때 큰 장점이기도 하다. 다양성, 자율성, 선택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이다. 사유재산인 민간 공동주택은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단지의 다양성, 자율성, 그리고 입주민의 선택권리가 존중되는 가운데 관리돼야 한다. 관리현장의 특성을 잘 반영해서 주민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구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리규약이다.

지난 8월 공동주택관리법의 본격 시행에 맞춰 시행령·시행규칙이 발표됐다. 지자체들은 이에 맞는 ‘공동주택 관리규약준칙’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준칙을 반영하려고 아파트 관리사무소 등이 분주하다.

사실, 지자체들이 만든 이 ‘공동주택 관리규약준칙’은 참조용에 불과해 강제성이 없다. 공동주택관리법 제18조에는 관리규약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써 관리규약 준칙을 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입주자등은 이 준칙을 ‘참조하여’ 관리규약을 정한다’고 돼 있다.

관리규약 제·개정 결정은 입주자 등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자체에서는 비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단지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획일적인 내용을 관리규약 준칙에 담고 있다. 그리고 지자체는 관리규약 준칙대로 무조건 관리규약을 개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입주민들이 지자체의 준칙대로 관리규약을 꼭 개정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 법원에서 관리규약준칙을 따르지 않은 행위가 위법이 아님을 보여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지자체를 상대로 한 과징금부과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아파트 청소·공사 등 용역 업체 선정 당시 시행되던 선정지침의 제정 근거인 시행령이 관련 법 조항 신설 전의 것이라면 해당 선정지침은 법규성이 인정되지 않는 행정규칙에 불과해 강제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또 “시·도지사가 정한 관리규약준칙은 공동주택의 입주민 등이 이를 참조해 자체적인 관리규약을 제정하도록 하는 하나의 기준에 불과하므로, 이들 지침·준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위법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 판결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한편, 공동주택 관리규약준칙의 작성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도 끊이지 않는다. 준칙은 그 대상 영역이 민간의 사적인 영역임을 존중해서 학자나 이해관계자들의 의견 등 다방면의 검토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몇몇 실무 공무원 선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경우, 정부의 표준관리규약이 사적인 영역에서 기준이 되는 만큼, 그 개정작업에서도 관련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법 개정만큼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관리전문가나 법학자 등의 참여 없이 행정기관 실무자가 결정, 입안하고 있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다양성을 수용 못하는 ‘획일적인 국토교통부 고시’ 기준에 따라 고소고발과 과태료가 남발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상황이다. 그리고 주민들은 과태료가 부과되면 비리가 있는 것으로 인식해 그런 관리주체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획일적으로 강요할 일이 아니다. 정책 당국은 일부 언론의 아파트 관리 비리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의식해 근본적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보여주기식의 탁상 행정을 하고 있지 않나 살펴봐야 할 것이며, 사적 영역인 분양 공동주택 입주민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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