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 손보사 화재보험 가입 규정…‘계약자유 침해’ 논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아파트는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막대한 재산피해는 물론 자칫 인명피해로까지 번질 수 있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16층 이상 아파트 등 특수건물은 화재나 폭발 등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적절한 재해 보상과 신속한 피해복구 및 제3자에 대한 신체손해배상을 해줄 수 있는 화재보험에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 아파트 등 특수건물의 화재보험 가입 의무 범위를 손해보험회사가 영위하는 보험에만 가입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계약 자유의 권리를 위반하는 규정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16층 이상 아파트가 보상 내용이 거의 동일한 공제 등 유사보험에 가입하더라도 보험업법에 따라서 손해보험회사의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재보험 가입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는 논리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같은 논란이 계속되자 최근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 등은 특수건물도 농·수협, 신협공제, 새마을금고 등 유사보험의 화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입법발의했으며, 금융감독원도 농협 등을 보험사업자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아파트 특약부화재보험 가입 의무
16층 이상 아파트는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규정상 특수건물에 해당돼 동법 제5조 제1항에 따라 손해보험회사가 영위하는 신체손해배상특약부화재보험(이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동법 제23조에 따라 5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이에 따라 16층 이상 아파트는 보장내용이 같은 보험 상품이라도 손해보험회사가 아닌 공제 등 유사보험의 특약부화재보험에는 원칙적으로 가입할 수 없다.
그러나 특약부화재보험을 ‘손해보험회사가 영위하는 곳’에만 가입케 하는 것은 손해보험회사에 엄청난 특혜를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사에 따라 보험 계약을 체결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생활하고 있는 아파트의 특성상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케 의무화하는 것은 공공성이 인정되지만 사보험인 손해보험회사에만 가입해야 한다는 규정은 공공성과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일부 아파트 입주민들은 “화재 등 재난발생시 보장 내용이 거의 같고 손해보험회사에 비해 가격도 저렴한 유사보험 등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비싼 보험에 가입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입주민들에게 재산상 불이익을 가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 농협 화재보험 가입 아파트 증가
이같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손해보험회사가 아닌 유사보험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하는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공제보험사업부는 아파트에서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한 보험액수가 지난 2004년 13억 가량에 비해 지난해에는 20억 가량으로 약 50% 증가했다고 밝혔다.
농협중앙회 강남공제사업단 왕석호 단장은 “특약부화재보험의 경우 특수건물 중에서도 아파트의 가입 비율이 지난해에 비해 점점 늘고 있다.”며 “보장 내용이 같으면서 타 보험사에 비해 저렴한 보험료가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손해보험회사의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실제로 벌금형을 받은 사례가 없다는 사실을 아파트에서 인지하면서 가입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화재보험협회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사보험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한 일부 아파트에 ‘신체손해배상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며, 손해보험회사의 화재보험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 중앙하이츠아파트는 지난 2002년에 화재보험 입찰공고를 내고 여러 화재보험사들의 보험료 견적을 받아본 결과 10% 가량 보험료가 저렴한 농협화재공제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했다. 그런데 지난 2004년 화재보험협회에서 손해보험회사의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5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이 아파트 김장환 전(前) 대표회장은 “손해보험회사에서 고발할 경우 농협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법적 투쟁을 벌일 각오도 하고 있다.”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경기도 의정부 민락 산들마을아파트4단지는 지난 2002년부터 3년 동안 농협의 화재보험에 가입했으나 화재보험협회와 의정부시에서 ‘화재보험 미가입 단지’라는 공문을 받고 올해는 손해보험회사의 화재보험에 가입한 상태다.
지난 2004년에 농협 화재보험에 가입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인덕원마을 삼성아파트도 화재보험협회에서 같은 내용의 공문을 받고 혼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 “화재보험 계약 강제, 위헌소지 높아”
지난 1991년 헌법재판소는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 제5조의 ‘특수건물’에 ‘4층 이상의 건물’을 포함시키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현행 손해보험회사의 특약부 화재보험은 입주민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특수건물이 손해보험회사가 영위하는 특약부화재보험에 가입토록 강제하는 것은 영리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손해보험회사에 영업상 큰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며 보험가입자에게는 그 의사에 반하는 계약체결을 강제하는 것으로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고 밝혔다.
비록 ‘특수건물이 손해보험회사가 영위하는 특약부화재보험에 강제 가입하는 것’ 자체가 헌법소원의 청구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검토 대상은 아니었지만 결정 내용상 충분히 위헌소지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함께 16층 이상 아파트 등 특수건물 소유자가 손해보험회사로부터 5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고발된 경우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벌칙 규정을 들어 농협의 화재보험에 가입한 아파트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농협에 가입한 특수건물 소유자에 대한 형사고발 사건에서 법원은 범죄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린 바 있다.
농협중앙회 공제보험사업부 관계자는 “손해보험회사에서 고발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있어도 무혐의 처분을 받아 헌법소원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며 “농협협동조합법은 보험업법의 적용을 배제하기 때문에 농협은 공제사업을 운영할 수 있고 법률에 농협은 특약부화재보험을 운영할 수 없다고 규제한 조항은 없으므로 농협의 특약부화재보험 가입은 불법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손해보험회사측은 “특수건물의 화재보험 가입은 보험업법에 의해 허가를 받은 손해보험회사만이 그 요건을 갖추고 있다.”며 “손보사보다 감독규제가 미비한 농협 등 유사보험에 특수건물의 화재보험 가입을 허가할 경우 소비자의 불만과 피해가 증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며 맞서고 있다.

◈ 개정안 발의 등 개선 움직임
특수건물의 화재보험가입을 손해보험회사에만 한정하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해 9월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 등은 16층 이상 아파트 등 특수건물의 화재보험 취급 대상을 현행 손해보험사에서 농·수협, 새마을금고 등 공제기관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최 의원은 개정안 제안 이유에서 ▲의무 보험 가입을 규정하고 있는 ‘도시가스사업법’이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등은 보험가입을 보험회사와 공제 등도 포함 ▲특수건물의 손해보험회사 특약부화재보험 강제가입은 계약자유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 등을 들었다.
최 의원은 또 농협은 지난 1961년부터 농협법에 따라 ‘공제’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화재보험업무를 취급해 왔고 ‘신체손해배상특약부화재공제’에 의해 특수건물소유자에게 화재보험 상품을 판매해 왔으며 지급여력비율 등이 다른 손해보험사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농협공제 등의 특수건물화재보험 취급 확대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농협은 지난 2월 금융감독원에 공제가 아닌 보험회사로 인정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고 나섰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농협중앙회 보험사업 부문인 농협 공제가 농림부가 아니라 금감원으로부터 감독을 받겠다며 보험사업자로 인정해 달라는 의견을 밝혀왔다.”고 말했다.
현재 민영보험은 금감원의 감독을 받으면서 모집자격제도 운영 및 불공정 모집행위를 제재받고 있으나 농협공제 등 기타 유사보험은 감독주체가 모두 달라 민영보험에 비해 보험 모집 규제가 비교적 단순하다.
농협화재공제가 금감원의 감독을 받게 되면 16층 이상 아파트 등 특수건물은 손해보험회사뿐만 아니라 농협의 화재보험에도 가입할 수 있어 특약부 화재보험료 인하 경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은 농협이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부문의 법인을 분리할 경우 원칙적으로 농협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현재 농협을 금감원 감독 대상으로 전환키로 하고 재정경제부 등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손해보험회사들은 농협을 보험회사로 인정할 경우 은행과 보험회사의 겸영을 금지하고 있는 은행법과 보험업법 규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농협에만 유례없는 특혜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향후 처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아파트의 동대표는 “업체간 소모적인 논쟁을 키우는 대신 아파트 입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법안이 개정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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