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허위 작성자로 만드는 ‘세대 내 소방점검표’

이택구의 소방클리닉

2025-11-26     이택구
이택구 소방기술사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세대 내 소방시설 점검 미실시 과태료 유예기간이 30일 종료된다. 이제 아파트 입주자나 소방안전관리자가 2년마다 세대 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게 된다.

소방청은 자율점검이라는 이름으로 ‘소방시설 외관점검표(세대점검용)’ 양식을 배포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비현실적이고 허위 작성이 불가피한 구조로 작동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입주민은 소방이나 건축 관련 법규를 모르는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점검표에는 ‘정상’ 또는 ‘불량’ 중 하나를 직접 표시하도록 구성된 점이다. 소방시설법 시행규칙 별지 제36호 서식에 따르면 점검항목은 소화설비, 경보설비, 피난설비, 기타설비로 구분되는데 마치 모든 아파트 모든 세대에 모든 소방시설이 설치된 것처럼 구성돼 있다. 실제로는 설치되지 않은 장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점검자가 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모두 ‘정상’으로 체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자동확산소화기와 주방자동소화장치는 둘 중 하나만 설치하도록 돼 있지만 양식에는 두 항목이 모두 포함돼 있다. 가스누설경보기 또한 본래 소화설비에 속하지만 경보설비로 잘못 분류돼 있어 입주민은 존재하지 않는 장비를 점검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피난설비 항목의 완강기, 피난구용 내림식 사다리, 대피공간, 경량칸막이 등은 건축물의 층수와 구조, 사용승인 연도에 따라 설치 기준이 다르지만 점검표에는 이런 구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예컨대 4층 이상은 건축법 시행령 제46조 제4항에 따라 대피공간을 설치해야 하지만 경량칸막이 설치를 통해 대체할 수 있다. 완강기는 3층 이상 10층 이하에서만 설치되는데 경량칸막이나 대피공간, 피난구용 내림식사다리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점검표에는 전층 공통 항목으로 들어 있어 입주민은 마치 모든 세대가 동일한 피난시설을 갖춘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특히 ‘경량칸막이 표지 부착 여부’ 항목은 2014년 이후 설치된 건물에만 해당하지만 해당 구분 없이 기재돼 있어 오래된 아파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런 형식적인 서류가 과태료 부과의 근거가 된다는 점은 더욱 심각하다. 정부는 300만원이 과하다는 지적에 따라 상한을 50만원으로 낮추는 시행령을 입법예고 중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금액이 아니다. 입주민에게 법률적 판단과 기술적 검증을 요구하는 제도 설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입주민은 설비 구조를 알 수 없고 관리사무소 역시 세대별 시설 구성을 일일이 확인할 권한과 자료가 없다. 결국 점검표는 형식적으로 채워지고 진짜 목적이었던 화재예방 효과는 사라진다.

아파트 관리주체 입장에서는 더 난감하다. 관리사무소는 입주민이 제출한 점검표를 수거해 보관해야 하지만 어떤 항목이 해당 세대에 설치돼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서류는 늘어나지만 실질적인 안전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상황에서 과태료까지 부과한다면 이는 국민을 안전관리의 주체로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책임을 떠넘기는 행정에 불과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태료 인하가 아니라 제도 자체의 현실화다. 층수, 건축연도, 구조별로 달라지는 시설 설치기준을 반영한 점검표를 새로 마련하고 입주민이 아닌 전문점검기관이 대행할 수 있는 절차를 명확히 해야 한다. 국민에게 허위 작성의 위험을 안긴 채 서류만 받겠다는 행정은 상식에 반한다. 소방청이 국민을 행정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주체로 대할 때 비로소 ‘자율점검’이 진정한 의미의 안전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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