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곤 칼럼] 위층의 발자국, 아래층의 눈물(1)
“층간소음 해결은 불가능해. 당하고만 있던가, 아니면 극단적으로 해결을 하던가”라며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말과 행동은 종국적으로는 층간소음을 해결해서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함이 묻어 있는 호소라는 것을 안다.
지난 여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갈등이 폭행으로 번졌다. 위층 아이들이 밤마다 집 안을 뛰어다니자 아래층 부부가 여러 차례 항의했고 결국 말다툼이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원인은 단순한 소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관심과 오해 그리고 공감의 부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층간소음은 이제 일상적인 사회 갈등이 됐다. 환경부에 따르면 매년 4만 건이 넘는 관련 민원이 접수된다. 위층의 생활 소리는 아래층의 고통이 되고 아래층의 항의는 위층에 간섭으로 받아들여진다. 양쪽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문제는 제도적 대응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소음 기준은 실제 생활 속 소음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민원은 측정 결과가 기준치 이하로 나오면서 ‘법적 조치 불가’로 끝난다. 피해자는 분노하고 가해자는 억울하다. 그 사이에서 이웃 간 신뢰는 무너지고 대화의 문은 닫힌다.
층간소음은 기술이나 제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벽을 두껍게 쌓는 것보다 마음을 여는 용기가 더 필요하다.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불편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한 걸음 양보하는 자세가 공동체를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다. 이웃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막기보다 그 속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층간소음은 결국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회의 거울이다. 아래층은 층간소음을 겪게 되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위층 사람을 미워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해야 하는지 문득 살인 충동은 왜 드는지의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심지어 우울증이 발병하고 심지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급박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때부터 층간소음은 단순한 층간소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위층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아래층이 항의하는 층간소음을 언제 주의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또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줄여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층간소음의 줄이기 위한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래층과의 층간소음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아래층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결론을 낸다. 그리곤 더 이상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나 아래층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아래층은 층간소음이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때까지 항의를 하고 이를 당하는 위층은 아래층과의 만남을 거부하게 돼 층간소음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은 상호 간의 끊임없는 항의와 이에 대한 무시로 인해 어느 순간 그들 사이에 폭행과 살인이 발생해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서로 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만족의 수준과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위층은 아래층의 층간소음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살인의 충동이 발생할 정도로 심각하므로 아래층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하고 아래층은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한 위층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즉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해 아래층이 기대하는 10점 만점은 불가능하므로 3~4점 정도만을 기대하고 접근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층간소음은 해결 방법이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층간소음은 위층과 아래층, 전문가가 한 방향을 바라볼 때 쉽게 해결된다”고 항상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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