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레트로, 힙을 잇는 시간의 경주

[주말에 가볼까?] 494. 경북 경주시

2025-11-20     길지혜
마총을 바라보는 오아르미술관 전경

‘천년고도 경주’의 전통 위에 젊은 세대의 감각 한 스푼을 더했다. 일명 뉴 헤리티지(New Heritage) 경주. 복고주의로 불리는 레트로가 복원하거나 계승하는데 머물렀다면 뉴헤리티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재창조하는 데 초점을 둔다. 즉 전통적 문화 요소를 재해석해 새로운 소비문화에 접목시키는 것.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온 경주에서 요즘 사람들의 요즘 경주 여행법을 만나보자.

고즈넉한 고분을 통창으로 바라보는 ‘오아르 미술관’이 개관 6개월 만에 경주의 명소가 됐다. 지난 4월 오픈 후 누적 관람객 18만명, 그러니까 한 달에 2만명이 다녀간 셈이다. 폭 29m, 높이 12m 통유리창이 하나의 대형 캔버스다. 들어서면 와락 안기는 신라 왕릉이 겹겹이 포개져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노서동 고분군을 마주한 미술관은 천년 고분과 현대 미술이 절묘하게 공존한다. 경주 출신 김문호 관장이 20여년간 수집한 600여점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열었다. 무엇보다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를 맡아 공간에 숨을 불어넣었다. 화려하고 튀는 기교를 부린 첫 설계를 뒤집고 주인공을 ‘고분’으로 둔 심플한 디자인으로 낙점했다. 결론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다.

오아르는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의 줄임말이다. 피카소·모네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작품은 없다. 그러나 경주다운 곳에서 경주답게 전시를 펼친다. 지하 1층 전시실, 1층 카페 및 전시실, 2층 메인 전시실, 3층 전망대로 이뤄졌다. 지하를 제외하고 미술관에선 고분군이 프레임에 잡힌다. 계절마다 명암이 달라지는데 초록에서 황금빛을 입은 가을의 고분은 APEC을 앞두고 정갈하게 매무새를 다듬은 모양이다.

2층 전시실로 오르면 환호가 터진다. 1층과는 또 다른 시선이다. 지난 18일 K-아트를 세계에 선보이는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가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소장한 회화와 영상 작품 49점을 한데 모았다. 이우환·박서보·하종현 등 한국 단색화 1세대를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 동시대 작가들의 실험적 작업이 나란히 소개된다.

2층 전시실에서 다락에 올라가듯 3층 전망대에 닿으면 발 아래로 고분군이 펼쳐진다. 고분을 바라보는 시선이 ‘올려다봄, 지긋이 바라봄, 내려다봄’ 세 가지 모두 가능한 곳이 오아르 미술관이다. 깨끗하도록 맑은 날 한옥 지구인 황리단길의 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머리에 기와를 얹어 애를 쓴다고 모두 경주다운 건 아닐 터. 과거 신라인의 삶의 부스러기가 발견되는 그 땅 위에서 뿌리를 흔들지 않은 채 가지를 다듬는 뉴 헤리티지를 만난다. 바로 황오동의 철도관사마을이다.

신경주역이 생기기 전 경주를 찾는 모든 이가 첫 발을 내디딘 곳이 황오동에 위치한 경주역이었다. 지금은 폐역이 되어 경주문화관 1918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철거 후 새로 짓는 편이 빠르다고, 효율성만 앞세우면 옛것이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 기차는 멈췄지만 인근 관사촌은 여전히 삶을 이어간다.

구 경주역은 폐역이 됐지만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구 경주역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관사촌은 도시 재생 사업을 거쳐 행복황촌 마을로 변신했다. 골목을 탐방하다 만난 곳이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옛 경주역장 관사다. 관사 제도는 일제 주택의 유입과정에서 생성됐는데 업무의 능률을 높이는 목적 외에 조선 사람들과의 격리를 통해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포함되었단다.

100년 전 적산가옥 모습 그대로 유지해 운영하고 있는 카페 보우하사 입구

과거 경주역장 관사는 현재 카페 ‘보우하사’로 옷을 갈아입었다. 녹슨 대문을 뒤로하고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발길을 사로잡는다. 반질반질한 둥근 손잡이, 우편함의 ‘LETTERS’와 보안업체의 최신 설비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카페 보우하사의 뜻은 레인보우의 ‘보우’, 하사하다의 ‘하사’의 결합어다. 계절마다 바뀌는 새로운 메뉴와 자연의 흐름에 맞춘 분위기로 무지개처럼 다채로움을 선사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곳은 목조, 주춧돌, 창살 등 적산가옥의 원형을 그대로 살렸다. 뜯어고쳐 편리하게 만들었다기보다 사용할 수 있게 끔만 다듬었다는 말이 맞겠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적산가옥이지만 구부러진 대들보는 우리의 역사를 품고 있다.

과거 ‘황촌’의 영화(榮華)를 간직한 황오동의 매력에 빠져볼 요량이면 도시민박에 묵어보길 추천한다. 경주역 관사를 개조한 도시민박이 운영되고, 명칭은 ‘민박’이지만 내부 시설이나 가격은 호텔에 가깝다. 주민들 삶의 체취가 밴 골목에서 MZ 세대가 이끄는 ‘황오동 뉴헤리티지’를 만날 수 있다.

구관이 명관이다.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 없단 말이 떠오르는 곳이다. 경주국립박물관은 지붕 없는 박물관인 ‘경주’를 만나기 위한 기착점이다. 뮷즈(MU:DS, ‘뮤지엄’과 ‘굿즈’의 합성어,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한 일상용품을 뜻한다)의 선풍적인 인기 덕분에 박물관으로 향하는 열기가 뜨겁지만 경주에선 본디 누구나 한 번쯤 들리는 경주의 필수 코스다.

신라역사관, 미술관, 월지관 등 굵직한 스폿을 뒤로하고 ‘신라천년서고’로 향해보자. 범종 가운데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을 지나 통일신라 왕실의 생활문화를 엿볼 월지관 옆 대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신라천년서고가 나타난다. 평범한 외관만 보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내부에는 반전 매력이 가득하다.

경주국립박물관 내 신라천년서고

신라천년서고는 박물관 소장 도서를 열람할 수 있는 박물관 안 도서관이다. 기존 수장고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한옥 외관은 그대로 살리고 내부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리모델링했다. 도서관 중앙에 우뚝 선 석등이 고풍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카페’에 온 것처럼 신라천년서고에서는 일명 ‘눕독’이라고 하는, 누워서 책을 읽기도 가능하다. 소파에서 자유로운 자세로 책을 읽어도, 음료를 마셔도, 이야기를 나눠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다. 문화유산을 사유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공간 자체가 여행지가 된다.

경주국립박물관 내 APEC 행사장으로 이용된 건물과 야외전시장

무엇보다 지금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도서들은 물론 국내외 전시 도록과 신라 및 경주학 관련 도서를 소장하고 있어 상설전시관 관람 전 훌륭한 선행학습장이 된다. 깊어가는 가을, 박물관 뜰을 거닐면 석탑, 석불, 석등, 비석 받침, 전각 기단 부재 등의 석조품 1300여점은 붉게 핀 꽃무릇과 조화를 이룬다. 대부분 경주와 그 주변 지역의 옛 절터나 궁궐터, 성터에서 옮겨 온 것들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경주를 찾는 모든 이들을 언제든 맞을 수 있도록 정확히 1년 365일 중 딱 3일(1월 1일, 설날·추석 당일)만 휴관한다. 신라천년서고는 평일과 매월 첫째, 셋째주 토요일에 문을 연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도서들은 물론 국내외 전시 도록과 신라 및 경주학 관련 도서를 소장하고 있어 상설전시관 관람 전 훌륭한 선행학습장이 된다.

글·사진: 길지혜(여행작가)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구석구석(korean.visitkore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