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폐쇄장치의 숨겨진 진실: 누구의 책임인가?
이택구의 소방클리닉
아파트 화재 안전의 핵심 중 하나는 ‘제연설비’다. 특히 11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에서는 계단실과 비상용 승강기 승강장에 급기가압제연설비를 설치하도록 소방 관련 법령이 강제하고 있다.
이 설비의 목적은 화재 시 연기의 확산을 막고 피난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제연설비의 핵심 구성요소인 계단실 출입문 자동폐쇄장치가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특별피난계단의 계단실 및 부속실 제연설비의 화재안전기술기준(NFTC 501A)’에 따르면 제연구역 출입문은 항상 닫혀 있어야 하며 화재 발생 시 감지기 작동과 연동해 자동으로 닫히도록 설계돼야 한다. 이는 과거 출입문을 스토퍼나 자전거 등으로 고정해 놓은 탓에 화재 시 연기가 계단실로 유입되는 사고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동폐쇄장치가 작동해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법 기준에 따르면 제연설비 작동 시 출입문 개방에 필요한 힘은 110N 이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화재 상황에서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등이 이 문을 열 수 없어 피난이 불가능한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는 제연설비 작동 시 문이 닫히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공 현장에서는 자동폐쇄장치의 ‘폐쇄력’을 임의로 조정하는 편법이 암묵적으로 허용돼 왔기 때문이다. 성능인증을 받은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감리자와 건설사는 110N보다 더 강한 폐쇄력으로 시공했음에도 준공이 승인된 것이다.
2023년 11월 30일 소방청은 자동폐쇄장치의 성능인증기준을 개정(소방청고시 제2023-47호)하며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술자에게 떠넘기는 자가당착적 조치를 취했다. 이는 제조업체를 보호하기 위함으로 해석되며 구조적 결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책임만 분산시킨 셈이다.
관리사무소는 자동폐쇄장치에 의해 문이 항상 열려 있는 상태에서 인수받기 때문에 실제 문개방력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문개방력은 위법 상태에서 인수된 것이며 이에 대한 책임은 관리사무소와 입주자대표회의가 아닌 소방청·감리자·건설사에게 있다.
따라서 공동주택의 관리사무소와 입대의는 ▲자동폐쇄장치의 성능과 설치 상태에 대한 명확한 검증 요구 ▲감리자와 건설사에게 문개방력 기준 준수 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인 ▲소방청의 기준 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통해 보다 실효성 있는 안전기준 마련을 촉구 등을 해야 한다.
자동폐쇄장치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장치다. 따라서 그 장치가 오히려 피난을 막는 벽이 돼서는 안 된다. 관리사무소와 입대의는 이 문제의 책임을 떠안기보다는 제연설비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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