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7의 인간(A Seventh Man)’을 다시 감상하며

윤성현 엔마스터 대표 (겸) 우리관리 기획실 전무

2024-10-01     윤성현

우리나라의 근본 문제인 저출산과 초고령화로 인해 우리의 일터인 관리사무소에서도 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까? 그렇다면 이주 노동자는 우리 사회와 일터에서 화학적 결합을 이룰 수 있을까? 결론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젊은 시절에 읽었던 ‘제7의 인간(A Seventh Man)’에 대한 감상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이 책은 1975년에 발간된 ‘유럽의 이주 노동자’에 대한 기록이다. 그 형식도 르포르타주로 보이도록 의도된 ‘존 버거’의 글과 사진작가인 ‘장 모르’의 합작품이다.

약 50년이란 시간의 틈새에는 유럽연합의 정식 출범, 2008년의 금융위기, 신자유주의 팽창과 몰락, 신보호주의, 반이민 정책, 난민문제, 브렉시트 등 이주 노동자 생존과 권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불평등의 해소라는 전반적 노력이 또 다른 제도와 정책 속에서 저지당하는 경험이었다.

1970년 초반 당시 유럽 내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제력을 가진 남유럽의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터키’의 노동자가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나 영국, 서독, 벨기에 등 서구 선진국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유입국에서의 이주 노동자는 타자화된 경계인에 불과하며, 정치적·사회적 존재가 아닌 노동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기계라는 현실을 악몽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글과 사진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불평등이라는 부자유(不自由)를 교묘하게 비꼬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주 노동자의 삶을 악몽보다 더 지독한 부자유로 규정한다. 그 삶을 자유의 대척점에 두고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내용을 자신만의 언어로 살짝 각색·인용하며 슬픈 기록을 애써 담담히 연민으로 보여주는 휴머니스트 작품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가난이라는 부자유 상태를 확대·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진 진보적인 작품이기도 하며 저개발 국가의 가난을 볼모로 세계적 불평등 체제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신마르크스주의 작품으로 종종 인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출발’, ‘일’, ‘귀향’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돼 있다. ‘출발’은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일’은 분업화된 미숙련 노동을 통해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노동의 소외를 담고 있다. ‘귀향’은 이주 노동자의 귀향이 가지는 헛된 결과를 이야기 한다. 그 구성이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흐름과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열악한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를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으나 현실에서는 디스토피아를 만든 것처럼 ‘귀향’도 이주노동을 통해 얻은 성공한 소수의 물질적 기반으로는 고향의 근본 모습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적 결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은 정치경제학이나 사회학적인 분석적인 글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비평의 관점에서의 글이다.

무질서하게 배치된 사진 속 피사체의 응시는 기억과 사건을 증거하는 듯 침묵의 함성을 지르고 있고 글과 사진의 배치, 운문과 산문의 연결, 산문 속에서도 현실의 기록과 감상이 부자유스럽다. 그 부자연스러움으로 저자는 불평등이라는 부자유에 저항하고 있다. 출간한 지 50년이나 되는 유럽 내 이주 노동자에 대한 오래된 책에서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왜일까? ‘1960년대에 서독으로 이주한 광부·간호사’ 우리 동포들의 이주노동의 애환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인이 유럽 내 이주 노동자로서의현실이 저러한데 아시아의 가난하고 작은 나라에서 가족과 나라를 생각하며 이주를 택한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 세대의 아픔, 열사의 중동에서 구슬땀을 흘린 우리 건설노동자, 그 이전 세대의 하와이와 멕시코 이주민, 일제 강점기의 간도·연해주·사할린 이주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우리 선조들이 생존이 위협받거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도 눈물겹다. 그러던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로 가는 강력한 흐름을 만들어 내더니 어느 순간에 우리 사회도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필요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이주노동 정책이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진일보했으나 여전히 이민이 아니기에 이주 노동자 정책은 필연적으로 불법체류를 유발하고, 불법이라는 족쇄는 국외추방이라는 불이익을 피하려는 이주 노동자를 또 다른 불평등에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마르크스는 신을 부정하며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패퇴했다. 불평등과 부자유가 부각될 때마다 여러 휴머니스트들이 목청을 높이고 사라졌다. 갑자기 AI와 로봇이 일하는 세상을 그려보며 그것이 희미한 기억 속 에덴동산의 모습일 거라고 자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