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열 주택관리사

김호열 주택관리사

좌석을 꽉 채운 아파트란 이름의 버스가 어디론가 향해 달리고 있다. 버스의 운전사는 관리소장으로 주택관리사란 대형 운전면허를 갖고 있다. 중형버스 이하는 주택관리사(보)란 운전면허가 필요하다. 버스가 설 때마다 일부 입주민이란 이름의 승객이 내리고 다른 승객이 타는데 거의 항상 자리를 꽉 채우며, 절대 입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버스는 크기에 따라 소형·중형·대형으로 나뉘고, 연식에 따라 중고와 신형이 있다. 신형이 중고와 크게 다른 점은 다양한 서비스 시설이 많다는 것이다. 소형에는 운전사 혼자서 버스를 운전하고 정비하지만 대형에는 정비기사 등이 따로 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모든 버스의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운전사는 어디로 갈 것인지 맘대로 결정하지 못한다. 운전사는 승객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승객들은 다 의견이 다르다보니 다수결로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입주자 대표라는 승객 대표를 만들어서 승객 중에서 몇 명의 대표를 뽑았다. 이제 운전사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승객 대표들에게 물어보고 경로를 결정한다. 운전사가 가장 힘들 때는 승객 대표들끼리 싸울 때다. 대표들 내에서도 파벌이 있어 각자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가라고 명령하면 운전사는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특정 대표가 운전대를 빼앗을 때다. 운전대를 빼앗긴 운전사는 그 대표가 맘대로 운전해도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과속,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등 교통위반으로 걸리면 그 책임을 운전사가 고스란히 떠안는다. 운전대를 잡은 대표는 자기는 운전을 안 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정직한 운전사는 운전대를 빼앗으려는 대표와 싸우다가 결국 버스에서 하차한다. 대부분의 운전사는 싸우지 않고 조용히 운전대를 내주거나 아니면 그냥 하차하는 쪽을 택한다. 운전사가 하차하면 다른 운전사가 타게 된다. 버스를 운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운전사는 많기에 운전사를 구하기는 식은 죽 먹기다. 대표들이 적극적으로 운전사를 바꾸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

정말 큰 문제가 생길 경우는 운전사가 적극적으로 운전대를 특정 대표에게 양보하고 뜻을 같이 할 때다. 승객들이 모르게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운전사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 드물지만 오히려 나쁜 길로 가자고 꾀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승객들은 버스가 어디로 가든 별 관심이 없다. 자기가 앉은 자리가 편하면 그만이고 버스가 큰 사고가 안 나면 그만이다. 버스가 한 달에 한 번씩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을 때마다 자신은 N분의 1의 기름 값만 내면 된다. 버스가 잘못된 길로 돌아가서 기름 값을 더 내게 되어도 N분의 1이라서 크게 표시가 나지 않기에 ‘조금 더 내고 말지!’라고 하며 문제가 있어도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관여하면 골치 아픈 걸 알기 때문이다. 승객 대부분은 버스 운행 중에 승차감만 좋으면 만족한다.

수많은 아파트 버스는 이렇게 달리고 있다. 아파트 버스가 올바로 운행되려면 좋은 운전사뿐만 아니라 좋은 승객대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아파트 버스가 하루빨리 적정한 길과 적정한 속도로 안전운행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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