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산하 김미란 변호사

최근 재미있는 판결을 본 적이 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을 역임하면서 그 기간 동안 매월 발생하는 관리비를 면제받았다는 것이다. 그 입주자대표회장은 회장직을 수행하면 응당 관리비를 면제받는 관행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그런 관행이 있었는지 여부가 명백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관행이 있었다고 해도 과연 적법한 것인지 의문이라면서 그런 관행의 존재를 믿었다 하더라도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봤다.

그 판결을 보는데 어찌나 우습던지. 입주자대표회장이 뭐라고 입주민이면 응당 납부해야 할 관리비를 면제받는다고 믿었단 말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싶었다.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해 일해야 할 회장이 맡은 소임을 져버리고 오히려 아파트에 손해를 끼쳤으니 업무상 배임죄가 성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판결문을 살펴보니 이 문제의 회장님은 직원들에게 쓰여야 할 복리후생비를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소송비용으로 사용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었다. 업무상 횡령죄는 업무상 임무를 위배해 보관하고 있는 타인의 재물을 마치 자기 소유인양 처분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특히 타인으로부터 용도가 엄격히 제한된 자금을 위탁받아 집행하면서 그 제한된 용도 이외의 목적으로 자금을 사용하게 되면 그 사용 자체로 업무상 횡령죄가 성립함이 원칙이다.

단체 자체가 소송당사자가 된 경우에는 단체의 비용으로 변호사 선임료를 지출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복리후생비는 음료나 생수 구입, 법정교육 이외의 교육훈련비 등 직원들의 복리를 위해 쓰여야 하니 아무리 입주자대표회의가 당사자가 된 소송이라 하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소송비용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응당 횡령의 혐의를 받게 될 일이다. 요지경도 이런 요지경이 없다 싶었는데, 이 부분은 무죄였다.

사정을 들여다보니 변호사 선임료 등의 비용은 용도나 목적이 직원의 복리후생에 제한된 ‘복리후생비’가 아니라 일반 관리비에서 지출된 것이었다. 법원은 입주자대표회의의 대표자로서 소송을 수행하면서 입주자대표회의 비용으로 변호사 선임비용을 지출한 점, 선임비용을 용도나 목적이 제한된 복리후생비에서 지출한 것이 아니라 일반 관리비에서 지출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춰 볼 때 위 소송의 수행을 위해 변호사 선임비용을 지출한 사실만으로 횡령죄가 성립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공동주택관리법령에 따르면 입주자 등으로부터 징수할 수 있는 관리비 항목의 세부 명세가 상세히 규정돼 있다(공동주택관리법 제23조, 동법 시행령 제23조 제1항, 별표2 참조). 관리비 항목은 일반관리비, 청소비, 경비비, 소독비, 승강기유지비, 지능형 홈네트워크 설비 유지비, 난방비, 급탕비, 수선유지비, 위탁수수료 등 10가지로 나뉘어 있고, 그 구성명세는 각 관리비 항목별로 또다시 자세히 규정돼 있다.

‘일반관리비’는 급여나 복리후생비 등의 인건비, 사무용품비 등의 제사무비, 제세공과금과 피복비, 교육훈련비, 그 밖의 부대비용으로 분류돼 있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23조 제1항 [별표2]에 따르면 ‘일반관리비’ 중 ‘그 밖의 부대비용’에는 관리용품구입비, 회계감사비 그 밖에 관리업무에 소요되는 비용이라고 규정돼 있다. 한국감정원이 발행한 공동주택 회계처리기준 해설서에 따르면 위 항목에는 회계감사비 외에도 변호사·법무사·노무사 수임료 등 전문가 비용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단체를 위한 소송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의 비용은 일반관리비 항목 중 ‘그 밖의 부대비용’에서 집행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된 횡령의 혐의는 일종의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 목적과 용도가 엄격하게 제한된 복리후생비에서 쓰인 줄 알았던 변호사 선임료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일반관리비 항목 중 ‘그 밖의 부대비용’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소송비용이었던 터라 횡령이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죄 판결을 선고받기까지 무수히 밟았을 절차에서 이 부분을 솎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영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소나 고발이 단초가 돼 경찰과 검찰까지 이어졌을 수사에서 왜 솎아내지 못하고 기소까지 될 수 있었을까?

단체의 일은 모두의 일인 동시에 누구의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단체의 이익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조차 ‘횡령’의 혐의가 이토록 쉽게 덧씌워진다면 과연 누가 단체를 위해 나설 것인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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