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인 듯, 도로 아닌, 도로 같은 도로.’
아파트 단지 내 도로의 특성을 압축한 표현이다. 아파트 단지 내 도로는 보행자에게는 안전 보호지대가 아니다. 법의 사각지대다. 어느 장소보다 안전해야 할 곳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이곳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형사처벌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도로상 횡단보도 등에서 인명사고를 내면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12대 중과실’에 해당돼 엄한 처벌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왜 아파트 단지 내 도로는 교통법상 도로가 아닐까. 바로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도로교통법은 ‘도로’에서의 차마(車馬)와 보행자의 교통을 규율하는 법이고, 아파트·학교 등 사유지 내의 통행로는 원칙적으로 도로교통법의 ‘도로’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도로교통법 적용도 받지 않고 있다.

도로교통법상 도로는 ‘도로법에 따른 도로, 유료도로, 농어촌도로 및 그 밖에 현실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 또는 차마가 통행할 수 있도록 공개된 장소로서 안전하고 원활한 교통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장소’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비돼 아파트, 학교 등 특정인 및 그들과 관련한 용건이 있는 자들만이 사용되며, 그들 스스로 관리되는 장소는 ‘도로 외 구역’이 된다. 도로 외 구역의 경우 과속, 난폭운전, 무면허 운전 등에 대한 단속·처벌 규정이 없다. 다만 도로가 아닌 곳에서 음주, 약물운전, 뺑소니사고, 과로운전 등을 한 경우에 한해 처벌 규정이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과 적용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아파트 단지 중 큰 곳에는 마을버스가 단지 내를 다닐 정도다. 여느 도로에서와 마찬가지로 운전자들은 차선을 따라 운전하고, 보행자들은 도로 위 횡단보도로 건넌다. 많은 사람과 차들이 뒤섞여 다니는 만큼 사고의 위험도 높다.

지난해 10월 대전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5세 아이가 승합차에 치여 숨졌다. 이 사고의 가해 운전자에게는 금고 2년이 구형돼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숨진 아이의 아버지는 지난 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대전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 교통사고…가해자의 만행과 도로교통법의 허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단지 내 교통사고 역시 12대 중과실에 포함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20만명 이상이 동의를 하며 국민적 관심을 끌었고, 정부도 제도 개선을 약속한 상태다.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보행자 보호의무’를 신설하고 위반 시 제재 수단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보호의무 위반 시 도로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운전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함께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안전 강화 및 처벌 규정을 마련하기 위한 국회의원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법적 미비를 보완해 앞다퉈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올 들어서만도 국회에 6건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빠른 시일 내 ‘도로 외 구역’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 강화와 위반 시 처벌규정 강화 등 법적으로 보완돼야 한다. 이와 함께 안전표지판과 과속방지턱 등 저비용 안전시설의 확충도 시급하다.

아울러 운전자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운전대 앞에서는 운전자이지만 차 밖에서는 나와 내 가족 모두 보행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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