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이다.

16세기 중후반 이전 영국은 순도 높은 금은으로 만든 주화를 거래수단으로 썼다.
우리에게 ‘천일의 앤’으로 잘 알려진 앤 여왕의 남편 영국 왕 헨리 8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재정난을 피하고자 화폐에 들어가는 금은의 함량을 줄인 불량화폐, 즉 ‘악화’를 남발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더 많은 구매력을 확보하고자 진짜 금은화를 녹여 더 많은 악화로 바꿨다. 결국 시중에는 진짜 금은화 즉, ‘양화’는 사라지고 불량화폐만 사용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왕실의 재정고문인 토마스 그레샴은 헨리 8세의 후계자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며 악화 제거를 요청했다.

경제학자들은 ‘양화 구축 현상’을 처음 발견한 그의 이름을 따 ‘그레샴의 법칙’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말은 지동설을 주장했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먼저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보다 40여년 앞서 “저질 주화가 유통되면 금 세공업자들은 양질의 옛 주화에서 금과 은을 녹여내 무지한 대중에게 팔 것”이라며 “새로운 열등 주화가 옛 양화들을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고 이런 현상을 간파했다.

그레샴의 법칙은 경제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널리 적용된다. 서로 경쟁을 벌이는 것들에 대해 가치를 식별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나쁜 것이 좋은 것을 서서히 밀어내 시장에는 나쁜 것만 남게 된다.

공동주택 관리 분야에서 이런 현상은 허다하다. 언론들에서 아파트 관련 비리 보도가 봇물을 이루는 사이 능력 있고 참신한 입주민들은 동대표 맡기를 꺼려하고 물러나려 한다. 아파트 관리부문의 좋은 인재들도 어려움으로, 역부족으로, 회의감으로 현장에서 떠나는 일이 자주 목격된다.

관리업계는 더 심각하다. 2010년 마련된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은 아파트 관리업체 선정의 획일성을 증가시켰다는 지적이 많았다. 수행능력 심사를 위한 표준평가표에 따르면 신용평가등급은 중요치 않다. 회사채 등급이 A인 곳과 투기등급에서도 낮은 B-인 곳의 차이가 거의 없다. 관리실적의 차이도 별 상관이 없다. 기업안정성도 중요치 않다. 잘하는 곳을 격려하고 뒤떨어진 곳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안 보인다. 제도적으로 오히려 막고 있다.

경비·보안·미화부문에서도 ‘양화 구축 현상’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들린다. 반칙 쓰는 사업자들이 경고 받지 않고, 원칙대로 하는 곳들은 어려움을 겪어 잔뜩 풀죽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레샴의 법칙은 정상인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만일 그레샴의 법칙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진실이 아닌 거짓이 판치는 사회, 진품보다 짝퉁이 넘쳐나는 사회, 비정상을 정상이라 우기고, 불의가 정의로 미화되는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공동주택 관리제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되고 정착하기 위해선 내달 공동주택관리법 시행시 우선적으로 불합리한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부터 변별력 있게 개선돼야 할 것이다. ‘악화’가 차단될 법적, 제도적 장치를 모색해야 한다. 양화가 구축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공동주택 관리 부문의 ‘악화 제거’를 요구할 ‘한국의 그레샴’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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