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예전 인기 있었던 유행가 가사 첫 소절이다. 이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면 아무도 길 닦아주지 않고, 누구도 수도나 전기를 넣어주지 않는다. 일정 지역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야 정부에서 길도 닦아주고 수도나 전기도 넣어준다. 어디 그뿐인가. 관공서도 들어오고 대형할인마트와 같은 복합문화공간도 들어온다. 그럼 살기 편해져 집값이 올라 재산증식이나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같이 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각종 편의나 이익은 다 누리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말이 있듯,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예전엔 인심이 이러지 않았다’, ‘아직도 농촌 시골에 가면 인심이 좋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실일까? 그렇다면 오늘날 이웃과의 관계가 삭막해진 것은 단순히 시대의 탓인가?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예전에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이웃사촌이라며 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온 타지 사람이라는 공감대와 모두가 먹고 사는 게 그만그만했기 때문이다. 딱히 이웃과 비교할 만한 것도 없었으며 살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일제강점기 서울 충정로에 세워진 유림아파트다. 일본 기업의 직원 숙소용으로 지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음해 같은 목적으로 지어진 충정로의 충정아파트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다.해방 후 최초의 아파트는 지난번 칼럼에 소개했듯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담벼락을 따라 지은 종암아파트다. 3개동 152가구가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지어진 이 아파트는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선호하는 남향으로 뒤에는 산, 앞에는 개천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의 풍수지리를 담고 있었다. 주거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집안에 설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아파트에 있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니다.”1958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 고대 안암동 담벼락을 따라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아파트인 종암아파트 개관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다.이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1960~70년대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기, 수도 서울로 몰려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필수적인 주거문화였다. 일명 시민아파트라고 불리던 당시의 아파트는 겉모양만 아파트였지 내부는 전통주택과 별 차이가 없었다.70년대 지금의 대학로 낙산공원에 자리했던 대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최초 아파트 개념의 공동주택 건설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는 세계적인 도시 국가로 주변 국가의 사람들은 앞다퉈 로마로 몰려들었으며 그러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공동주택의 발달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당시 로마의 공동주택은 4~5층 규모의 건축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콜로세움원형경기장 같은 건축물을 보더라도 공동주택 정도는 충분히 건설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당시의 로마는 오늘날의 뉴욕처럼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오랜
평소 위·아래 세대간 관계어떤가 따라 확연히 다른 반응세심한 배려는 여럿 함께 사는아파트에선 기본 자세 “302호에는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은퇴를 하신 70대 노부부가 살고 있고, 그 아랫집 202호에는 맞벌이로 아직 자녀가 없는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우리 주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세대 구성원이다. 이런 평범한 이웃 간에 층간소음이 발생하게 될 경우 평소 위·아래 세대간의 이웃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3가지 유형이 있다.“어느 잠 못 이루는 한밤중에 303호에서 쿵쿵거리며
아파트 기본 구조는벽·바닥 연결된 거대한 유기적 구조물진동 발생하면사방·대각선으로 진동 전달돼층간소음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공통점은 이것이 같은 단지 내에서 ‘나만 당하는 억울한 일’이라고 여기는 피해의식이 크다는 점이다. 이 피해의식은 적절한 시간 내에 해소되지 못하는 경우 시간이 갈수록 심각한 분노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분노가 장기간 쌓이게 되면 사람의 이성은 점점 판단력을 잃고 끔찍한 사고로 연결되곤 한다. 지난 여름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인 사건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아파트 층간소음은 나만 당
성서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아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셈과 함과 야벳이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홍수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류의 조상이 됐고, 그중에서 함이라는 아들은 ‘검다’라는 뜻으로 흑인의 조상이 됐다는 설이 있다.‘야훼께서도 알아주는 힘센 사냥꾼’이라고 성서에 묘사된(창세기 10:8~12) 니므롯은 ‘지상 최초의 권력자’, ‘세계 최고의 영걸’로 번역되기도 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일한 왕이었던 님로드 왕이라고 한다. 이 님로드 왕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장남인 구스의 아들로 노아의 증손자가 되는
“잠시 눈을 감고 아주아주 먼 옛날을 상상해 본다”지금처럼 공부 잘하고 스펙 좋은 사람이 출세하는 시대가 아니라, 단지 몸 건강하고 용감한 사람만이 사냥에 성공해 가족과 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엔 모두가 동굴에 모여 살았다. 어두워진 저녁, 누군가는 사냥도구를 손질하고, 누군가는 벽에 낙서를 하고, 누군가는 우는 아이를 달래고, 누군가는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다.이사 갈 빈집에 들어가면 유독 소리가 크게 울리듯이 동굴에서는 더욱더 소리가 크게 울린다. 부족단위로 무리 생활을 하던 구석기인들은 이런 시끄러운 동굴에서 어떻게
유년시절의 첫 기억은 서울 동숭동 낙산에 빼곡하게 서있었던 동숭동 시민아파트였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랫동네 정원 딸린 주택이 너무나 부러워 보여, 언젠가 아버지께서 돈을 많이 벌면 우리도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가서, 개도 키우고 꽃도 심으며 진짜(?) 우리 집에서 살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드디어 그렇게 고대하던 주택으로 이사를 간 것도 잠시, 강남이 개발돼 본격적인 아파트 문화가 시작되면서, 대학로 낙산 자락의 마당 딸린 2층 양옥집에서 1년 열두 달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